편안해지길 바라니까, 신경이 쓰이니까
[1화 | 눈-부시다와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공연 당일이었다. 리허설을 마치자마자 나는 흘긋 파트너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맙소사, 생전 처음 콩쿠르에 나서 바짝 긴장한 어린아이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굳어버릴 일인가. 실소가 터져 나왔지만 가까스로 웃음을 꾹 찍어 누르는 데는 성공했다. 부표처럼 흔들리는 시선 앞에서 내가 손을 파닥파닥 흔들어 보였다.
“저기, 블라우. 많이 긴장돼?”
“어, 아니.”
앞뒤가 맞지 않는 답을 한꺼번에 내놓은 입술이 순간 헤 벌어졌다. 나는 다시 있는 힘껏 혀를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그렇구나아. 난 또, 빳빳하게 얼어있는 줄 알고. 아님 됐어.”
고개를 가로젓는 블라우는 여전히 기름칠이 필요한 구식 로봇처럼 삐그덕거렸다. 이거 대형사고 나겠는데, 어쩐다. 연습 때는 그렇게나 유연하고 능청맞게 잘해줬으면서, 의외로 섬세하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말고 뭘로 저 긴장을 풀어주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득 내 시선이 녀석의 악보에 가 닿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모국어로 보이는 특이한 문자와 나도 알아볼 수 있는 악상 기호들이 뒤섞여 여간 빽빽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초여름의 숲처럼 촘촘해진 악보를 흘깃대다 보니 뭔가가 떠올랐다. 그래, 저거다. 내가 최대한 심드렁하게 말을 걸었다.
“그새 새순이 엄청 돋았네?”
“새순?”
블라우가 이 중요한 때에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힐끔 나를 보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에 긴장이 조금 물러가고 호기심이 손톱만큼 스며드는 걸 본 내가 쾌재를 불렀다.
“난 악보를 보면 항상 어린 숲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잘 봐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열기를 띠었다. 내가 무리 지어 늘어선 16분 음표와 겹겹이 쌓인 화음을 가리키며 주장했다.
“얘네 가문비나무 닮지 않았어? 저기 위에 붙임줄들 늘어선 거 보면- 있잖아, 오선과 오선 사이를 거닌다고 상상해 봐. 숲 아래에서 우듬지 보는 기분하고 비슷할 것 같지 않아?”
“우듬지.”
블라우가 내 말을 따라 했다. 미약한 수긍의 기운을 느낀 내가 신이 나서 톤을 높였다.
“그렇다니까? 잘 생각해 봐. 우리가 그간 연습하는 동안 뭘 만들었는지를 보라고. 나름으로 우린 우리의 숲을 키운 거야. 어디에 더 밀도 있는 짙은 그늘을 드리울지, 어느 부분을 전지해서 빛이 스며들도록 할지. 해석이니 뭐니 그런 관념적인 말은 지금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림을 그려보라고.”
그림을 그려보라는 내 말이 주효했던 것 같다. 조리개를 조인 렌즈처럼, 블라우의 눈길이 가늘고 선명해졌다. 좋았어.
“우리가 조경한 음악의 공간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영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 그치만 그런 반응까지 미리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리는 우리가 준비한 음악을 들려주면 되는 거야.”
“그런가.”
“그렇다니까.”
녀석이 피식 웃더니 끝까지 모른 척해 주려 했던 나의 호의를 짓밟는 한마디를 했다.
“내가 긴장해서 실수할까 봐 걱정돼?”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사실 맞지만. 내가 말을 삼키고 표정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블라우가 한발 빨랐다.
“실수하지 않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그래.”
뭔 소리야. 무대에서 실수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아마도 내가 얼굴로 그 말을 한 모양이었다. 녀석이 조금 진지하게 덧붙였다.
“내 말은, 지금까지는 그냥 뭐 어떻게든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너무 열심이니까 나 때문에 망치면 미안해서.”
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오히려 부담감이 커졌다는 소리인가. 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됐어. 너나 나나 할 만큼 했는걸. 우리 이만큼이나 준비했다고, 알아? 그렇게 내지르는 기분으로 보여주고 오면 되지.”
나는 무대 위를 비추는 스크린을 힐긋거리다 다시금 블라우의 악보에 눈길을 주었다. 녀석이 저 음악의 숲에, 가지를 쳐내고 빛을 드리우고 싶은 부분이 어디인지 나는 잘 안다.
“이제 준비해 주세요, 니나 미하일로프, 블라우 윤.”
상냥한 음성이 이렇게 고압적으로 들리기도 어려울 거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은 절반도 못 했는데, 벌써 순서가 돌아오다니. 내가 한숨을 쉬는데 블라우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돼?”
맥락 없는 엉뚱한 질문에 입을 벌렸던 것도 잠깐이었다. 도대체 그런 건 왜 묻는데, 하는 반문을 넣어두고 내가 대답했다.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일리야 니콜라예비치 미하일로프.”
블라우가 뭔가를 생각하며 말을 고르는 것처럼 우물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간… 함께 연주해 줘서 고마웠어, 니나 일리니치나 미하일로바.”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하니, 이 먼 타국의 땅에서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외국인을 만나게 될 줄이야. 나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어 급하게 녀석의 블레이저 소매를 붙들었다.
“저기, 네 이름 뭐야?”
블라우가 뭐 이런 어이없는 질문을 다 하냐는 듯 나를 봤다. 뭐, 왜. 생뚱맞은 질문은 네가 먼저 했거든. 내가 이런 의미를 담아 눈을 치뜨자 블라우가 그제야 내 의도를 눈치챈 듯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 맞아. 여기서 부르는 그 이름 말고, 원래 진짜 네 이름 말야. 너의 모국어로 소리 내는 그 이름.
“조금 어려운데.”
나는 다급해졌다.
“괜찮아. 배울게. 가르쳐 줘.”
나는 블라우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에 집중했다.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인 녀석이 천천히 발음했다.
“윤-파-랑. 내 이름을 뜻 그대로 여기식으로 읽으면 블라우가 되거든, 그래서. 우리는 성을 제일 앞에 써.”
내가 어설프게, 힘겹게 천천히 따라 했다.
“파, 랑.”
“응, 잘하네. 그거야, 내 이름.”
주먹이라도 부딪치든, 하이파이브라도 나누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블라우, 아니, 파랑과 달리 나는 바이올린과 활을 나눠 드느라 빈손이 아니다. 대기실을 나서며 내 첫 시도를 칭찬한 녀석의 어깨가 아까와 달리 걸음걸이에 따라 느슨하게 흔들리고 있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표제어_마음 쓰다/모티브_Carulli, Duo In G major Op.34]
사진: Unsplash의Antoine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