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하여
“와.”
다섯 살 서라가 환호성을 질렀다. 소파의 등받이 쿠션 뒤로 집어넣은 고사리 손이 뭔가를 움켜쥔 채 힘껏 당겨냈다. 손 끝에 딸려 나온 것은 한 권의 그림책이었다.
기껏 고생스럽게 숨겨놓은 엄마가 이 장면을 봤다면 통탄할 일이었다. 낡은 하드커버의 그림책은 몇 달간 입원했다 나온 환자처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치면 척추 골절상이랄까. 책등은 이미 한 번 크게 쪼개진 뒤로 폭이 넓은 박스테이프로 봉합하는 수술을 겪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흉터가 남은 것이 마음이 아팠던지 서라는 온갖 현란한 캐릭터가 그려진 테이프를 가져와 그 위로 과감한 미적 수선을 감행하고 썩 만족스러워했다.
모서리는 수년간 서라의 애정 어린 손끝에서 닳고 닳아 모서리 라운딩을 마친 목재 테이블처럼 맨들맨들했다. 엄마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라야, 이건 네 역사다, 네가 만든 역사.”라고 말했을 때에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역사가 뭔지는 몰라도 내 거라면서 왜 내가 못 찾게 일부러 숨겼지? 서라는 온당한 의문을 품은 채 책 표지를 쓰다듬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허공을 향해 울부짖는지, 히죽거리는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시선을 한 공룡을 통통한 짧은 손가락으로 덧그리던 서라가 이내 옆에 늘어선 빨간 글자의 제목을 한 자 한 자 짚으며 또랑또랑하게 읽어 내려갔다.
“고, 녀, 석, 맛, 있, 겠. 다.”
제목 읽기에 성공한 서라가 흐뭇하게 웃었다. 다섯 살 배기는 짐짓 한글을 다 뗀 형님들처럼 능숙하게 표지를, 이내 면지를 넘겨 본문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숙달된 낭독가가 읽는다 한들 서라처럼 문장 하나하나에 감정의 파고를 실어 정성껏 읽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마음속에 품은 친구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가는 일, 그들이 겪는 마음의 파랑(波浪)을 함께 겪는 것, 오래도록 가슴을 울리는 문장을 음성으로 되살리는 것.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사는 그 마법을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서라가 이미 수십, 수백 번은 족히 찾아갔을 그 세계를 다시 열었다.
“못 살아, 너 그거 어디서 찾았어?”
젖은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오던 엄마가 엎드린 채 다리를 접었다 폈다 신나 하며 책장을 넘기던 서라를 보며 기막힌 듯 웃었다. 서라가 말없이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엄마가 숨기면, 내가 못 찾을 줄 알고, 같은 의기양양한 승리감이 잔뜩 배인 미소였다.
“난 다 알아.”
“어떻게 아는데?”
“소리가 들려.”
“에이, 거짓말.”
“진짠데…”
서라는 고개를 돌려 다시 책에 시선을 파묻었다. 엄마가 믿든 말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지금은 맛있겠다가 아빠를 만나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니까.
“서라야, 그게 그렇게 좋아?”
서라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검지를 세워서 도톰한 입술 앞에 세워 보였다. 이제부터 중요한 대목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제스처였다. 엄마가 서라의 요구를 존중하려는 듯 조용히 옆에 앉아 서라가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고작해야 40페이지 남짓한 그 작은 세계 속에 무엇이 있기에 이 어린아이가 이토록 깊게 몰입하는가. 엄마에게는 그것이 풀리지 않는 신비였다. 무엇이 이토록 아이를 강하게 끌어당겨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돌아가고 또 돌아가게 만드는 것일까. 서라에게는 저 한 권의 그림책이, 얼마나 크고 넓고 아름다운 세상인 걸까. 자신이 보지 못하는 무엇을 발견했기에 서라는 기꺼이,
“엄마!”
엄마의 생각은 거기서 멈추었다. 서라가 드물게 흥분한 목소리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것은, 발견한 자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혹은 명명권을 얻어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새로운 발견에 들뜬 부름이었다.
“엄마, 이거 알았어?”
“뭔데, 뭐길래 그래?”
“이거, 이거. 얼굴이 달라져!”
“누구?”
“여기 봐, 아빠! 티라노!”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말솜씨가 의욕만큼 빠르게 쫓아와주지 않아 늘 답답해하는 서라가 제 가슴을 하얗고 말랑한 꽃빵 같은 주먹으로 콩콩 쳤다. 엄마가 진지하게 서라의 손끝을 쫓아 그림책 속 캐릭터의 표정을 신중하게 살폈다. 이내 엄마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돌았다.
“와, 진짜네. 진짜 달라. 엄마는 지금껏 몰랐는데, 우리 서라 대단하다.”
서라가 가리킨 것은 여간해서는 알아보기 힘든 아주 미약한 차이였다. 눈을 표시한다는 역할 외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던 점 두 개의 미묘한 위치가 이만한 뉘앙스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걸 기어코 발견해 낸 서라의 집요함이, 그 미세한 차이마저 찾아내는 시선이 감동스러웠다.
“서라가 보기엔 티라노 아빠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아?”
서라가 가슴을 쭉 폈다.
“내가 아빠 맞다!”
“뭐?”
서라의 말에 엄마가 끝이 매듭지어지지 않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을 굳힌, 결의에 찬, 또는 확신과 불안 사이에서- 같은 말들을 알지 못하는 서라가 할 수 있는 표현의 최대치였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도 서라는 스스로 뭔가 부족하다 느꼈는지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페이지 위를 몇 번이고 누볐다. 마침내 서라가 스스로에게 다짐을 두듯 비장하게 선언했다.
“또 볼 거야.”
“매일 보잖아.”
“내일 보면 또 보여.”
“뭐가?”
“다른 거.”
“다른 책?”
“아니, 아니…”
서라는 제 마음과 꼭 맞아떨어지는 요철을 가진 단어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얼굴로 미간을 잔뜩 모았다. 엄마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서라는 생각을 방해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니까.
마침내 제 머릿속 어휘 창고를 샅샅이 뒤지기를 끝내기라도 한 듯 서라가 환하게 외쳤다.
“말이야, 엄마!”
“말?”
“응, 오늘 못한 말.”
그 지당한 사실에 굳이 내가 무슨 부연설명을 해줘야 하냐는 듯 서라가 엄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매일같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차마 전하지 못했던 말을 시간을 들여 읽어내어 주는 일. 서라는 좋아하는 한 권의 그림책, 한 편의 이야기를 통해 가장 흔하면서 가장 귀한 마음을 매일같이 배우고 닦는 셈이었다.
[표제어_애착(-을 갖다)/모티브_미야니시 타츠야 「고 녀석 맛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