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보기가 힘겨울 정도로 빛이 강렬해서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같이 무대에 설 협연자를 찾는다는 너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튀어 나간 말이 불씨가 되었다. 피아노과까지 찾아와 발을 동동 구르는 네 모습이 영 안쓰러워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럼 내가 할까, 그 피아노 반주? 내 말에 네가 얼마나 반색했던지 나는 외려 움츠러들고 말았다.
기대도 하지 않은 구원의 손길이 뻗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너는 내 손을 덥석 움켜쥐고 말했다. 고마워, 진짜 고마워. 다들 어렵게 거절하는데, 왜 거절하는지 나도 사정을 아니까 두 번 세 번 거푸 부탁할 수도 없고 그냥 포기해야 하나 했어. 정말 고마워, 지금 내가 무슨 기분인지 넌 정말 모를 거야.
네 눈에 가득 담긴 감사와 기대를 읽어낸 순간, 나는 조금 전 내가 뱉어낸 말들을 어떻게든 회수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내가 마음먹은 것은 뭐든 할 수 있는 그런 허구적인 능력이라도 있다면, 그러면 네 귀에 흘러 들어간 나의 무책임하고 생각 없는 말을 긁어내어, 그 낱자 하나하나를 부러뜨리고 움켜쥐어 찌그러뜨려 흔적조차 남지 않게 불태워 버릴 텐데. 그러면 정말 좋겠는데, 후회해봤자 늦은 거겠지.
절반쯤은 동정으로 건넸던 말이 내 앞에 수십 배의 책임과 빽빽한 음표의 무게가 되어 돌아와 풀어헤쳐졌던 날부터, 나는 곱절의 의무감과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쏟아부어 무책임을 변상하기 시작했다. 연습실에 앉아 함께 보낸 첫 20여 분이 지날 무렵, 바이올린을 잠시 내려놓은 네가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왜 웃냐고, 내가 무슨 큰 실수를 했냐고 물으니 너는 황당한 듯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아니, 피아노와 함께 있는 너는 학교 안에서 스쳐 지나가며 보는 너와 같지 않아서, 그 간극이 너무 커서 심지어 다른 사람처럼 보여서 그랬어.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애꿎은 건반에 손을 올려놓고 처음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처럼 건반을 댕댕댕 누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나를 잠시 물끄러미 보다가 너는 천천히 덧붙였다.
이런 말, 좀 별로로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 학교에서만큼은 영재니 수재니 하는 말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잖아. 나는 말없이 수긍했다. 음악원이야, 원래 영재가 넘쳐나는 곳이지, 하는 비딱한 생각은 굳이 뱉지 않고.
네가 계속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이런 말 좀 실례일 수도 있긴 한데, 너는 그런 류로 보이지 않거든.
나는 실소하고 말았다. 어째서? 네가 말했다. 나쁜 뜻은 아니야. 타고난 재능 따위, 그까짓 게 뭐 그리 대단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도 너한테서는 그런 말이 읽혀. 그럼 너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겠지, 재능을 타고난 사람을 욕하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비뚤어진 소리나 품고 있다고. 솔직히 너하고 음을 맞춰보기 전까진 나도 그런 생각 조금은 있었거든. 그런데 뭐야, 그런 열정이 있으면서 왜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어?
나는 네가 한 말을 곰곰 되씹어 보았다. 열정이라.
혼잣말처럼 중얼대던 내가 고개를 흔들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 건 몰라. 그냥 연습이나 하자. 그런데 왜 9번이야? 자선공연인데, 좀 더 대중적이고 밝은 게 좋지 않아? 너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을 굴렸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그러다 너는 이렇게 말했다. 9번도 충분히 대중적인데? 난 9번이 더 좋아, 격정적이고, 원숙하고... 그리고 난 내가 하려는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은 이 첫머리가 너무 좋거든.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부탁. 지금부터 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잠시 이쪽을 봐 주시겠어요? 그리고!
너는 잠시의 숨도 돌리지 않고 크게 짝, 소리를 내며 손뼉을 쳤다.
여기서 네 역할이 중요해, 모든 바이올린 소나타가 그렇지만, 특히 여기서 오르내리는 선율은 정말이지.... 너는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가상의 에페Épée를 쥔 것 같은 자세를 선보였다. 네 말이 이어졌다.
알겠어? 너는 내게 종속되어선 안 돼, 이건 대화가 아니야, 각자의 기량을 최대한 선보이는 결투여야 하지만 우리는 적이 아닌 거지. 이해하지? 지나치게 들뜬 너의 감정을 쫓아가긴 어려웠지만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럼 그런 파트너를 찾았어야지, 나랑 하는 게 아니라. 순간,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순간, 네가 활짝 웃었다. 무슨 소리야. 너 이상의 파트너를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너는 말을 중단하고 다시 악기를 들어 피아노 반주가 빠진 멜로디를 연주했다. 한결 심심해진 선율에 귀를 기울이는 나를 의식한 듯 네가 말했다. 넌 지금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딱히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 안다. 알지만 굳이 그 말을 소리 내어 답하지 않은 것은, 어쩐지 말로 꺼내어 놓으면 그 감각은 급격한 온도변화를 맞은 유리처럼 순식간에 부서져 비산할 것만 같아서- 였기 때문이었다.
내겐 그 감각이 중요했다. 늘 어디서든 겉돌았던 내게, 처음으로 같은 것을 추구하는 동료를 만났다는 그런 초현실적으로 감동적인 느낌. 그것은 발설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너는 내가 구태여 말로 표현하지 않은 이야기를 모두 읽어낸 것 같은,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다시 가만히 서로의 눈을 마주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선율 속으로, 우리가 추구하던 그 너울 속으로 마음을 던져 넣었다. 그렇게, 건반을 바라보다 불현듯 절벽에 올라선 느낌으로 네게로 시선을 옮겼을 때 내가 본 것은, 네 이마에 고였던 것은 분명 긴장과 감격- 성취감이 빚은 땀방울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놀랍게도 하나같이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자잘한 빛망울들이 무리지어 네 얼굴을 따라 타고 흐르면서, 너를 빛나게 만들어 기어코 나는 눈을 감았다. 빛이 지나치게 강하여 마주 보기조차 어려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반사적으로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는 것뿐이니까.
[표제어_눈부시다/모티브_L.v.Beethoven, Violin Sonata No.9 Op.47 「Kreutzer」]
사진: Unsplash의Joel Wynco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