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사라져 가는
발길 닿는 곳곳이 가을의 색을, 계절 특유의 질감을 입고 있었다. 발 끝에 걸리는 작은 자갈들을 톡톡 걷어차던 여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이내 떨구었다. 머리 위의 하늘은 고향의 하늘과는 어딘가 다르다. 어디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글쎄. 뭐라고 딱히 설득력 있게 대답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익숙한 표현 방식으로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고. 니나 일리니치나 Нина Ильинична는 누구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얕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가방을 단단히 어깨에 걸머멨다.
“니이나아-”
이렇게 말꼬리를 늘이면서 부르는 걸 보면 같은 과의 헤일리가 분명했다. 호명에서조차 한 사람의 성격이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 혹은 누군가에 대한 감정이 읽힌다는 사실은 늘 니나를 흥미롭게 만들었다. 적어도 헤일리에겐, 니나는 질투가 나거나 까닭 없이 얄미운 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친근감과 호의가 가득한 음성이 그 증거였다.
“왜애-”
헤일리의 말투를 흉내 내어 꼬리를 길게 빼어 대답을 하니 헤일리가 까르르 웃으며 니나의 왼팔을 답삭 끌어안았다.
“이제 행사도 끝났으니까 피아노과 애랑 그만 다녀도 되잖아.”
“응? 아니, 아니야. 걔 찾고 있던 거 아니었어.”
니나가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지만 헤일리는 눈초리를 가늘게 좁힌 채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낼 뿐이었다.
“글쎄, 뭐. 니나야 어떨지 몰라도 피아노 걔는 친구도 별로 없잖아. 그러니까 기회다 싶어서 너한테 친한 척 들러붙을 수도 있지.”
“파... 블라우는 그런 성격 아니야.”
“뭐 아무튼. 같이 가아. 연습실 갈 거지?”
“응.”
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일리의 수다에 귀를 기울여주며 흘긋 다시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그리운 하늘과는 달랐다.
“어? 페도라다.”
연습실을 막 빠져나오던 금발 벽안의 소녀가 그들을 보고 멈추어 섰다. 니나의 단 하나뿐인 동향 친구이기도 한 페도라 니콜라예브나는 이름 때문에 번번이 웃음을 사곤 했다.
-페도라? 정말 이름이 페도라야?
-응, 바로 그 페도라.
페도라는 손끝으로 기다란 둥근 챙 모양을 그리면서 정수리 한가운데를 콕 찍어 크라운이 푹 패인 모자 페도라 fedora의 형태를 만들며 너스레를 떠는 식으로 제 이름을 강조하며 꼭 한마디를 덧붙였다.
-영어로는 시어도라 Theodora야, 그거. 그쪽이 편하면 시어도라라고 불러도 돼.
그러나 페도라의 그 시그니쳐 제스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페도라의 이름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학교의 재간둥이와 애교쟁이를 넘어 마스코트처럼 이름과 얼굴을 알려가던 페도라와 니나는 같은 러시아 출신임에, 그리고 우연히도 같은 노보시비르스크 지역 출신임에 금세 가까워졌다. 외국인 유학생 처지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유학파가 많은 음악원의 특성상, 그들이 소외감을 느낄 기회가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러니까, 문제의 2월 24일 전까지는.
이후 니나와 페도라를 보는 눈빛은 미묘하게 바뀌었다. 안쓰러운 듯도 하고, 혼란스러운 것도 같고. 예전과 다름없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점차 그들을 보는 시선의 좌표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평균적으로 3 사분면에 속하게 되었다.
“연습?”
“아, 응.”
페도라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듯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다 헤일리에게 미안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저기, 괜찮으면 니나하고 얘기 좀 해도 될까?”
낙엽 세 장이 쉼표를 두고 떨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헤일리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인가 봐?”
“응, 뭐, 약간.”
“미안해, 헤일리. 오늘은 먼저 가도 될까? 정말 미안.”
모처럼 니나를 독점해서 의기양양하던 헤일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나 늘 활달하던 페도라가 몹시도 처져 보였기에 헤일리는 페도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내일은 꼭 같이 해?”
“응, 꼭! 정말 미안, 그리고 고마워.”
니나가 고개를 힘 있게 끄덕여 보이자 비로소 헤일리는 씩 웃으며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연습은 혼자 해야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쟤는.”
페도라가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니나가 쓰게 웃었다.
“그냥, 잘 안 되는 부분 서로 봐주기도 하고 겸사겸사 해석 비교도 하고 그런 거지 뭐... 근데, 왜?”
왜인지 모르지 않으면서도 굳이 왜냐고 물었던 니나가 페도라의 시선을 좇았다. 그곳에 존재하지만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것 같던 니나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니나도, 페도라도, 학교에 입학한 이후 단 한 번도 고향에 가지 못했다. 이번 방학에는, 이번에는. 그렇게 기회를 미루고 미루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전쟁이 터져 버렸다. 그걸 전쟁이라고 부르는 게 온당한지는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이 계절, 노보시비르스크의 바람은... 어땠더라.
“방학 때 못... 갔지?”
“못 갔지.”
페도라가 나무 둥치를 툭툭 걷어차며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할 말은 그게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 꼴이 날 줄 알았으면, 바쁘다는 핑계로 다음 해에 가겠단 소리 같은 건 안 했을 거야.”
“누가 알았겠어, 그런 걸.”
“있지, 난 벌써 생각이 안 나. 아주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이나 맨날 가서 놀았던 얼음 장식이 있는 공원 같은 건 기억나는데,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들 있잖아. 거기에도 여기에도 있는 것들. 그러니까 나무, 벤치, 맨날 지나쳐 다니는 가게들 같은 거 말야. 그런 거, 같은 이름인데 장소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거. 그런 게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물가물해.”
페도라의 말을 듣던 니나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그들이 지금 머무르는 도시의 가로수가 어떤 수종인지, 벤치의 단조가 어떤 디자인으로 되어 있는지는 또렷이 떠오르는데 고향의 것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기억의 창고 아래에 있긴 한 건지, 아니면 이것은 앞으로도 별 쓸모가 없을 테니 내다 버리자, 하고 이미 기억에서 비워진 것인지.
“... 나도 그래. 생각나는 게 없네.”
“황당하지. 원래 그런 건가? 기억이란 건 구체적인 형태나 색은 다 지워 버리고, 그냥 이름만 남기는 건가. 와, 진짜 뭔지 모르겠다, 기억이란 거. 추억은 또 뭐고. 그냥 다 흐릿해. 와중에 화는 나는데, 이걸 어떻게 삭이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페도라의 말이 길게 이어지는 내내 니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기억을 헤집기 시작했다. 페도라의 말마따나, 분명히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는, 그림처럼 선명했던 기억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일반명사 같은 이름들만이 남아 뒹굴고 있었다.
[표제어_아스라이/모티브_Tchaikovsky,「The Seasons, Op. 37a, TH 135 - 10. October: Autumn's Song」]
사진:사진: Unsplash의Andraz Laz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