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고 두려운 마음
“야, 이걸 진짜 했네?”
해랑이 기막힌 투로 내뱉었다. 민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빙글거리며 재빠르게 화면을 핀치아웃해서 해랑의 얼굴 가까이 들이댔다.
“봐보라니까?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감정이입도 적당히 해라... 인형이 좋아하긴 뭘 좋아해?”
“와, 이런 공감 지수 빵점 같으니.”
“일단 이런 곳에서 곰 인형을 끌어안고 돌아다녔다는 점에서는 네가 용자다, 응.”
“왜 이렇게 시니컬해? 넌 집에 봉제 인형 하나도 없어?”
인형이 없냐니, 그럴 리가. 해랑은 오히려 자신이 어린 시절의 친구에게 여전히 집착한다는 걸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쪽이었다. 행여나 그런 걸 들켰다가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건 정말이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다.
해랑이 멈칫한 사이 민서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다른 아이들은 뜻밖에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교에서 압도적인 팔로워 수를 보유한 시윤조차 그 틈에 끼어 흥미롭다는 듯 민서의 사진첩을 구경하고 있었다.
“잘 찍었네? 누가 찍어줬어?”
“그치? 우리 언니가.”
인기인의 긍정적인 반응에 힘을 얻은 민서가 해랑을 짧게 흘겼다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사진 속의 민서는 팔뚝만 한 길이의 베이지색 곰인형 품 안에 스무디 컵을 밀어 넣고 곰 앞발 위에 제 손을 얹어 함께 컵을 감싼 채 사뭇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예쁜 말 전시장 같은 해시태그 아래로 해랑은 구경도 못 해 본 댓글들이 주렁주렁 늘어졌다. 하트 개수와 댓글 수가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보다 해랑은 곰 인형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인형 털에 습기 배이면 안 될 텐데...’
오늘 아침에도, 가을이라 그런가 유난히 해가 깊이 들어오기에 이때다 싶어 해랑은 창가 가까이 곰 인형 사랑이를 앉혀 두고 나왔다. 사랑이를 창가 근처에 앉혀놓고 나온 날이면 집에 가자마자 엄마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직사광선을 하루종일 내내 받고 앉아 있으니 안 그래도 오래되어서 색이 빠졌는데 이젠 얼룩이덜룩이가 되어 예쁘지 않게 되었는데 속상하지도 않냐는 것이 골자였다.
그건 엄마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물론 해랑도 사랑이의 털이 옛날처럼 더 이상 선명한 레몬색이 아닌 것은 몹시도 안타까웠지만 뭘 어쩌겠는가. 시간이 가면 색은 바래기 마련인 것을. 해랑은 엄마가 어느 순간 치워버린 엄마 아빠의 결혼사진 속 엄마가 얼마나 예뻤는지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지금의 엄마에게 그때의 예쁨이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엄마가 엄마가 아닌 게 아닌데. 원래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에 굳이 불복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해랑이 터득한 나름 삶의 지혜였다.
여름 내내 장마가 길었기에, 모르긴 몰라도 몸속 깊이 채워진 솜까지 습기가 남아있을 것 같아, 가끔은 바짝 말려주고 싶었다. 그래야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직접 물에 푹 담갔다 뺀 것이 아닌 이상에야 인형의 속을 채운 솜까지 물먹은 듯 눅눅해질 리는 없었으나 해랑은 ‘그럴 법한 기분’조차도 신경 써야 한다는 주의였다.
그것은 지금은 멀리 유학을 떠난 오빠 윤파랑에게서 배운 태도이기도 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오빠가 ‘그럴 법한 기분’ 하나가 얹히고 빠지고에 따라 음색이 달라지기도 한다고,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느낌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었다.
- 이거 들어 봐, 해랑아.
그 말을 하자마자 오빠는 누구나 알 것 같은 도-미-솔을 한꺼번에 눌러 어우러지는 소리를 들려준 다음, 씩 웃더니 같은 화음을 한 번 더 들려주었다. 순간 해랑이 눈을 크게 떴다.
- 뭐야, 뭐 한 거야, 오빠?
분명히 같은 소리였는데, 어딘가 달랐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해랑은 자신의 마음 각각 다른 부분이 눌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랑의 표정을 본 오빠는 빙긋 웃더니 그것 봐, 하고 평소 종종 연습하던 곡으로 돌아갔다.
그날의 경험은 해랑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겼기에, 해랑은 ‘~할 듯’, ‘~할 법’이 아무 가치가 없는 말이 아님을 믿게 되었다. 남들은 일별하고 말 사소함 속에서 헤아릴 수 있는 결이 늘어날수록 해랑의 세계는 풍부하고 깊어졌다. 그것은 남들은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일조차 해랑에게는 어떤 무게를 가지고 다가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민서든, 이 교실 안의 어떤 무리가 받아들여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민서와 해랑에게 곰 인형은 같은 범주의 사물이었으나 의미의 맥락은 분명코 다를 테니까.
민서의 곰 인형이 겪은 일에 대한 해랑의 해석을 민서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사전을 지니는 법이지만 타인의 평가에 예민한 나이일수록 자신의 해석을 드러냄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고유하고 싶지만 그 고유함으로 인해 고립되는 것이 크게 두려운 나이의 한가운데를, 해랑은 지나고 있었다. 고유의 지분을 배분하는 방식에 따라 고독해질 수도 있었고 고고해질 수도 있었다.
해랑은 무리 속의 안전을 택하면서 고유함을 포기했으나 간혹 불쑥불쑥 알 수 없는 충동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했다.
바로 지금처럼.
“근데 김민서, 곰돌이 털은 잘 말려줬어?”
갑자기 웅성거리던 소리가 뚝 멎었다. 도대체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릴 들은 건가 싶었는지 민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랑을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윤해랑은 시크와 시니컬을 동량으로 섞은 것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으니까.
“이게 무슨 시크 앤 시니컬 윤해랑 답지 못한 상냥한 궁금증이래?”
“아니, 그냥. 축축한 저대로 두면 기분이 좀...”
“난 또 뭐라고, 네가 그럼 그렇지.”
해랑은 내 기분이 아니고, 곰돌이 기분이 좀 그럴 거라고,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굳이 이 지금껏 잘 숨겨 온 자신의 내밀한 정체성을 들키고 싶진 않았으므로 해랑은 그쯤에서 입을 닫고 몸을 돌려 먼저 교실을 떠났다. 해랑의 그림자가 완전히 복도 바깥으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있던 시윤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근데 있잖아, 윤해랑 쟤 조금 전에 ‘곰돌이’라고 하지 않았어? 인형이 아니라?”
[표제어_꺼리다/모티브_정소영 「곰돌이가 괜찮다고 그랬어」]
사진: Unsplash의Yiran 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