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도 뱃속도 추우니까 배추된장국 한 그릇
벌써 10월의 마지막 주래! 일 년이 이렇게 빨리 간다, 얘들아.
한 게 없지는 않지만, 하고 싶었던 일들을 모두 이뤄놓기에는 택도 없이 짧았던 365일이었지. 너희는 어땠을까.
엄마는 계획했던 건 거의 다 한 것 같은데, 성과는 아직 잘 모르겠어. 일단 목표치를 달성한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할까. 성과도 따라주면 참 좋을 텐데, 세상 일이란 게 내가 열심히 했다고 모두가 애썼네 잘했네 칭찬해 주고 알아주는 건 아니어서.
그걸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사회에 적응하기는 쉬운데, 마음 한구석에 찬바람이 종종 들긴 해. 그렇다고 별 대단한 수가 있진 않아. 그냥 또, 어깨 한 번 으쓱 털어내고 다음 목표를 향해 가는 거지.
그런 묵묵한 성실함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빛을 발할 때가 오기도 하는데, 오면 좋고 안 오면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매일의 성실이 어디 가진 않거든. 엄마는 그걸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게 배웠어. 지금으로 치면 알림장인데, 그 알림장에 담임 선생님은 이렇게 제목을 쓰게 하셨거든. <성실한 삶>이라고.
어떤 말들은 무슨 의미인지 당장은 알지 못해도 한 사람의 인생에 두고두고 오랜 울림을 전하기도 하는데 엄마한테는 그 말이 그랬던 것 같아.
그래서 엄마가 삶의 매 순간 성실했느냐면 그건 또 아니지만, 대체적으로는 성실모드 ON이었달까. 그랬던 거지. 살아가는 일의 방향성이 되어주었다는 게 제일 맞는 말인 것 같아. 아무튼, 성실하게 먹는 것 역시도 그런 삶의 방식의 일환이 된 것 같고.
때론 대충 또 때론 한상 그득, 어쨌든 한 끼라도 빼먹지 않고 챙겼던 것 역시 그런 태도로부터 비롯한 것 같기도 해. 갑자기 궁금하다, 그 선생님 여전히 정정하신지.
날이 확 서늘해졌잖아, 아침에 일어나면 괜스레 이불을 한 번 더 당겨 덮고 뭉그적거리게 되는 계절이 오고 있는 거지. 분명히 아침에 입맛도 밥맛도 없을 게 뻔하니(옛날에 할머니가 입맛이 없으면 밥맛으로 먹어,라고 하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는데 이제 엄마가 너희한테 그러고 있는 걸 보면 가끔은 소름이 돋아…) 하다못해 따뜻한 국물에 밥이라도 말아먹으라고 배추를 뜯어 넣고 된장국을 끓여 볼게.
먼저 맛국물을 만들자. 당연히 무나 멸치나 다시마나 이것저것 넣어서 만들면 당연히 맛있겠지만, 어휴 복잡해. 그냥 멸치만 하자, 멸치만. 국멸치나 디포리 한 주먹 정도 넣고, 알배기 배추라면 한 통, 통배추라면 1/4 포기 정도 준비해 놓기로 하고.
국물이 잘 우러났으면 멸치는 건져서 버려도 돼.
아, 웃긴 거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이걸 참 좋아하셔서 찌개나 국물 낸 멸치도 절대 못 버리게 하시고 그게 제일 맛나다면서 꼭꼭 씹어 드시곤 하지.
선이가 네 살 때였나, 할아버지가 된장찌개에 들었던 국멸치를 다 건져 드시는 동안 눈을 빛내며 그걸 보고 있다가 할아버지가 아, 맛있다, 하고 감탄사를 뱉는 순간 와앙 울었더랬어. 할아버지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시고 엄마도 얘가 왜 이럴까…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나는 하나도 안 주고 생선 혼자 다 먹었어, 하고 대성통곡을 했었지 아마. 세상에서 생선을 가장 좋아하는 **선 씨의 입맛은 어릴 때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걸까. 이건 다시 생각해도 많이 웃기긴 하다.
아, 웃기는 얘기 하기 전에 배추 뜯어 넣고 된장도 풀고, 마늘도 파도 다져 넣으라는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했지? 했겠지, 그럼.
그럼 이제 뚜껑 닫아놓고 중약불로 해놓고 한 시간 넘도록 두면 돼. 배추가 젓가락만 대도 찢어질 정도로 노글노글해지면 그때가 배추 된장국이 제일 맛있을 때거든. 물론 모든 국물 요리의 법칙은 여기에도 통해서, 다음 날이 더 맛있긴 하지만 뭐. 그래도 갓 끓인 배춧국의 맛은 또 젓갈이나 도시락김 같은 것만 놓고 먹어도 밥 한 공기가 쉽게 사라질 정도로 딱, 이 계절에 어울리니까.
오늘도 밥 한 끼 잘 챙겨 먹고 잘 다니길 바라. 꼭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