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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Kyoo Lee Oct 19. 2020

누나 양념과 빨간 도시락 (by 이진규)

University of Washington Quad

유학을 와서 제가 다녔던 University of Washington (UW)은 넓고 아름다운 캠퍼스를 가진 대학입니다. 그런데 그 큰 캠퍼스에 학생식당이 없다는 점은 약간의 놀라움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일 다른 메뉴로 식단이 짜여서 제공되고, 캠퍼스 밖에서 사 먹는 다른 계획이 없을 때 default로 이용할만한 식당이 없었습니다. 대신에, 건물마다 커피와 함께 포장된 샌드위치를 파는 작은 카페가 있고, 쇼핑몰의 푸드코트처럼 Subway 나 Pagliacci pizza와 같은 프랜차이즈 업체 몇이 모여있는 공간이 있는 학생회관 같은 건물이 두어 개가 있어서 학생식당 또는 구내식당의 역할을 하는 듯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숙사 건물에는 구내식당이 있어서 제가 기대했던 모습으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아쉬워도, 나라와 문화가 다르니 그에 맞출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다행히 샌드위치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 않는 날에는 로스쿨 건물의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었습니다. 학교 밖으로 한 블럭만 나가면 다양한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많이 있었지만, 값도 비싼 편이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식사 약속이 있는 경우 외에는 잘 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요령? 도 생겼습니다. 로스쿨에서는 보통 12시부터 12시 50분까지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강연들이 많이 열렸습니다. 이때 피자나 샌드위치 같은 점식식사도 제공이 되었습니다. 비교법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로 진행된 “Global Monday” 나 사회정의 관련 이슈들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던 “Justice Tuesday” 같은 정기 강연들은 꼭 챙겨 들었습니다. 다양한 강연도 듣고 점심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시애틀에서 처음 살았던 아파트입니다. 사진 2층의 오른쪽 창문이 주방쪽 창문입니다.

아내가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저녁은 집에서 먹었습니다. 그 당시 아내는 저와 함께 학교에 가서 책도 읽고 친구도 만나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와 함께 집으로 오는 날도 있었고, 집에 남아있는 날도 있었는데, 그럴때면 제가 집에 오자마자 저녁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바지런히 식사 준비를 하곤 했습니다. 부슬비가 오는 어느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어서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다 보면 우리 집 건물이 보이고 이어서 뿌옇게 김서린 주방 창문 너머로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아내 모습이 보입니다. 아내가 저를 보게 될 때가 있는데, 그때면 아내는 언제나 반갑게 손을 흔듭니다. 저도 따라 손 흔들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갑니다. 언제나 생각할 때면 참 마음이 따뜻해지는 어느 하루 어느 저녁입니다.


네. 딱 여기서 글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따뜻하고 정겹고 훈훈하게.


하지만 글의 제목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정말이지 감추고 싶은 저의 철없는 망언에 대한 고백이기에 지금도 저는 쓰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아내도 쓰라고 꾹꾹 찌르고, 저 또한 고백과 반성을 하는 마음에서 그 이야기들도 적어보려 합니다.


(어느 점심의 망언 - 빨간 도시락)


주로 샌드위치 등으로 간단히 해결하는 점심이라, 가끔씩 아내가 도시락을 준비해주는 날은 점심을 잘 먹는 날이 됩니다. 그 어느 날, 아내가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버스를 타고 학교에 와서 도시락을  먹게 되었습니다.


김언니: 자~ 도시락 먹어요.
나: 잘 먹겠습니다! 근데 반찬이 모두 빨간색이네. 나는 노란색이 좋은데..
김언니: (부글부글) (조용히 도시락통을 덮는 시늉을 한다)
나: 앗 미안. 제발..

반찬투정도 아주 창의적으로 합니다. 빨간색 노란색....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투정을 했는지 지금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 망언이 창의적인만큼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날 아내가 한시간 반을 버스를 타고 왔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저는 지금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느 저녁의 망언 - 누나 양념)


저의 망언은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고백한 김에, 비슷한 게 하나 더 있는데 그것도 공개합니다.


김언니: 자~ 오늘은 순두부!
나: 잘 먹을게! (먹기 시작한다) 근데.. 이거 국물 맛이 어제 먹은 해물찌개 맛 하고 똑같네!
김언니: (부글부글)
나: 누나의 모든 요리에 들어가니까, “누나 양념”이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언제부턴가 저보다 5살 어린 아내를 누나라 부르게 되었는데, 덕분에 아내가 신혼 때 블로그를 따라서 즐겨 만들었던 양념이 졸지에 누나 양념이 되었습니다. 신혼 때 요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아내가 어느 블로그에서 만능 양념을 배워서 사용했던 것인데, 맛이 다 똑같다고 타박을 했다니, 제 자신이 정말이지 부끄럽습니다.


아... 정말이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저의 철없음입니다. 그래서 얼른 수습을 해야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두 망언이 있었던 때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내는 여전히 열심히 요리를 하고 음식 만드는 일을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진짜 맛있습니다. 이건 진짜입니다. 믿어주세요. 제 기억이 맞다면 저는 아내의 음식에 대해 세 번째 망언을 한 일이 없고, 지금은 무엇이든 잘 먹습니다.


제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를 하나 제시하며 이 글을 맺고자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삶의 모든 부분에 변화가 있었는데, 시애틀 지역에서는 한인 반찬가게들이 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일주일에 두 번 며칠을 먹을 수 있는 요리와 반찬을 세트로 구성해서 집으로 배달해주는 “ㅇㅇ반찬”이라는 비지니스가 시애틀의 젊은 한인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너무 맛있고 일주일 식단의 구성이 너무 훌륭해서 참 많은 분들이 좋아하십니다. 더군다나 정말 성실하게 일주일에 두 번 인스타에 메뉴 구성을 공개해주시기 때문에, 늘 볼 때마다 군침이 돌게 됩니다.


저 역시 ㅇㅇ반찬의 인스타 포스팅을 즐겨봅니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즘 핫한 이 반찬구성을 제가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구성이 진짜 좋아 보이는데, 나 개인적으로는 집에서 늘상 먹는 음식이고, 아내가 다 만들 수 있는 메뉴라서, 별로 사 먹고 싶은 생각은 안 드네.’ 그래서인지 저는 ㅇㅇ반찬에서 김치라든가 족발과 같은 몇몇 메뉴들은 가끔 사 먹지만, 일주일 식단은 아직 주문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계속 이렇게 그냥 아내가 만들지 않는 음식들만 주문을 해서 먹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 생각이 들었던 날 아내에게 뭔가 대단한 거라도 발견한 듯 그러한 저의 진심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여보, 내가 오늘도 ㅇㅇ반찬 메뉴 구성을 봤는데, 정말로 내가 늘 먹는 음식들이어서, 참 맛있겠다 싶으면서도 시켜먹고 싶지는 않은 거 있지.” “새삼 여보에게 너무 고맙더라고.”


이것이 지금 제 마음입니다. 너무 대놓고 자랑하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아내의 모든 음식이 너무 맛있습니다. (네, 정말입니다. 이제는 반찬 투정하지 않습니다 ㅠ)


아.. 이제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을까요?


아내의 요리 솜씨를 보여주는 사진들도 던져보며 저는 제 망언들에 대한 수습을 이어갑니다.


우리 가정의 일상적인 “집밥”입니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지인들을 초청했을 때입니다.
네, 저는 이렇게 생색내는 일만 합니다.


아내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며, 이 고백을 맺습니다.


P.S.

일을 하는 요즘은 점심에 주로 제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습니다. 전날 저녁에 먹고 남은 반찬들 또는 Trader Joe에서 파는 인도 카레, Burrito 나 Pizza 같이 간단히 데워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주 메뉴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저녁은 아내의 현란한 음식 솜씨에 감탄하며 집에서 맛있게 먹습니다.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카레와 파 계란 볶음밥 이외의 음식도 연마하여 가끔이라도 저녁 식사 준비를 담당하는 것이 앞으로 남겨진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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