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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품지 않는 자는 절망도 할 수 없다-조지 버나드 쇼
생존 확률이 3%인 고환암을 극복하고 ‘투르 드 프랑스 사이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랜스 암스트롱은 말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할 때 붙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희망입니다. 아니 두려움을 넘어 새로운 세계까지 보게 합니다.”
희망은 어두운 밤하늘에 떠있는 반짝이는 별과 같다. 우리의 삶이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내 가슴속에는 반짝이는 별이 없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반짝이는 별이 없는 사람은 살아있는 송장과 같다.
우리 팀 P선수는 1998년 10월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병원에 실려 온 P선수는 정밀 검사를 하였고 몇 시간 후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의사를 만났다.
“저 선생님 저는 언제쯤 퇴원 가능할까요?”
“퇴원이요? 오랜 시간 병원에 입원하셔야 합니다. 지금 P환자는 명치 밑으로는 움직일 수 없어 평생 걸을 수 없습니다.”
의사의 말을 들은 P선수는 처음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걸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의사의 말은 거짓이 아닌 진실로 다가왔다. P선수는 앞으로 평생 걸을 수 없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졌다. 옆에서 P선수를 간호하는 부모님은 자식 걱정으로 매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몇 달이 지난 후 P선수는 자기를 위해 헌신하는 부모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밤낮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P선수의 대‧소변을 매일 받아주었고, 잠은 간이침대에서 쭈그리고 주무셨다.
이 모습을 본 P선수는 사무치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부모님이 날 위해 이렇게 헌신하는데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다음 날부터 P선수는 부모님을 위해 희망을 가지며 재활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 결과 P선수는 스스로 바닥에서 휠체어로 옮겨 탈 수 있게 되었다. P선수는 희망을 갖고 더 노력하여 1년 5개월 만에 병원에서 나왔다. P선수는 ‘퇴원을 했으니 더는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P선수는 욕창으로 7~8년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P선수에게 절망과 고난이 찾아왔다. P선수는 많이 괴로웠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옆에서 나를 위해 헌신하시는 부모님 때문이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P선수는 재활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던 중 현재 같은 농구 팀에서 훈련하는 S 선수가 휠체어농구를 권해 재활의 목적으로 팀에 합류했다. 휠체어농구를 처음 해본 P선수는 가슴이 뻥 뚫렸다. 장애로 인해 느껴보지 못한 부분을 휠체어농구를 통해 느끼기 시작했다. P선수는 부모님의 헌신과 건강해지자는 희망이 있었기에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낼 수 있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P선수는 현재 A 기관의 사무국장으로 시련에 빠진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미국의 작가, 교육자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인 헬렌 켈러는 ‘희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불가능한 것을 이룬다.”
희망은 그런 것이다. 고난과 역경에 처한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음이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는 사람에게 희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깨달았다.
초등학교 3학년, 봄 소풍은 학교에서 가까운 무령왕릉으로 갔다. 새벽에 보슬비가 잠깐 내렸기에 아침에 날씨는 매우 화창했다. 나는 전 날 샀던 과자와 음료수를 책가방에 집어넣었다. 가방을 다 챙긴 나는 동생과 함께 김밥을 몇 개 주어 먹고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엄마 이따가 만나요.”
나와 동생은 학교까지 장난치고 웃으며 신나게 걸어갔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교실로 들어가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먹으며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때 스피커에서 학생 주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딩~동~뎅’
“아! 아! 모든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모여 주세요.”
모든 학생은 운동장으로 나와 두 줄로 맞춰서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들었다. 훈화 말씀이 길어지자 나는 발을 좌·우로 움직여 땅을 팠다. 길고 길었던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끝났다. 1·2·3·4·5·6학년 순으로 두 줄씩 무령왕릉으로 출발했다.
50분 후 우리 학교 학생들은 무령왕릉에 도착했다. 각 학년별로 담임 선생님의 지휘 하에 장기자랑을 시작했다. 나는 숫기가 없어 반 친구들의 춤과 노래를 보면서 박수만 쳤다. 장기자랑이 모두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엄마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 무령왕릉에 도착해서 나랑 동생을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가 싸온 김밥을 먹으면 우리 가족은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각 학년별로 보물 찾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공책이라는 종이를 발견해 선물로 공책을 받았다. 시간이 흘러 각자 집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타고 온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동생이 먼저 자전거에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저만치 가고 있는 동생을 향해 소리치며 쫒아갔다.
“야 거기서 내가 타고 갈 거야.”
동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다. 사람들 모두 횡단보도를 건너자 선생님은 더 이상 건너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신호를 보지 못한 채 동생을 쫒아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때였다. 횡단보도 앞에 버스가 정차해 있고 그 뒤에 1톤 차가 버스를 추월해 나를 치였다. 나는 1톤 차와 부딪치면서 15미터를 붕 떠서 날아갔다. 이때부터 나는 의식을 잃었다. 몇 시간 뒤 눈을 떴을 땐 정말 영화처럼 세상이 뿌옇게 보였고, 내 앞에는 아빠가 울고 계셨다. 아빠는 눈을 뜬 나를 보더니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간호사 여기, 여기”
나는 소리치시는 아빠를 보고 또다시 의식을 잃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고, 내 옆에서는 나랑 비슷한 아이가 중풍으로 죽어 그의 가족들이 울고 있었다. 우리 아빠 엄마는 나도 옆에 아이처럼 죽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계셨다. 근데 다행히도 나는 점차 의식이 돌아와 몇 주 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내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에 친척들은 병문안을 왔다. 사촌 동생은 내 얼굴을 보더니 괴물이라며 소리를 치며 내 곁에 가까이 오지 않았다. 나는 큰 충격을 받고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를 다독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 매일 아버지는 일을 끝내고 병원으로 오면서 내가 좋아하는 조립식 장난감을 사 오셨다. 그럼에도 나는 장난감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내 머리맡에 장난감 박스가 쌓여갈수록 내 몸은 더욱더 야위어 갔다.
몇 달이 흘렀다. 화창한 아침 창문 틈으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문을 열어보았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웃으며 학교를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학교에 가자’라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빠가 사 온 조립식 장난감을 맞췄고, 밥도 두 공기씩 먹었다. 기적처럼 내 몸은 좋아졌고, 정확히 8개월 만에 병원에서 퇴원을 했다.
괴테는 말한다.
“희망만 있으면 행복의 싹은 그곳에서 움튼다.”
누구나 희망만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다.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는 희망에 대해 “저는 손과 다리가 모두 불편하지만, 남아있는 힘으로 최선을 다해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어요. 여러분도 누구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집념을 갖는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꼭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조막손으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야구선수 짐 애보트는 어떡하면 당신처럼 성공할 수 있냐는 질문에 “희망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결코 불가능은 없다는 말을 잊으면 안 됩니다. 장애는 성공을 위해 넘어야 할 하나의 단계에 불과할 뿐입니다.”라고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