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하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린 Jan 08. 2018

이사 풍경

눈 오는 겨울, 우리의 첫 보금자리를 떠나며

눈.


일어나자마자 코 끝이 시린 것이 뭔가 불길하다 했더니, 창 밖 세상이 온통 하얗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엄지 손가락만 한 눈이 쉼 없이 떨어진다. 온통 하얀 세상. 이른 아침 누구도 밟지 않은 깨끗한 거리. 평소 같았으면 낭만에 잠시 취했을 법도 한데 오늘은 날이 아니다. 이사를 하기에는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 곁에 선 남편도 같은 생각인 듯 표정이 좋지 않더니 이내 내 마음 같은 말을 한다. "망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열쇠를 주러 달려 나온 부동산 사장님은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덕담을 건넨다. "눈 오는 날 이사하면 잘 산다던데, 대박 나려나 보네~! 우리도 눈 오는 날 개업해서 대박 났잖아요." 분명히 눈 오는 날 이사하는 고충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 만들어낸 속설 이리라. 그래도 한껏 치솟았던 짜증이 조금 누그러진다.




손 없는 날.


이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걱정은 바로 이사비. 미신을 믿지 않는 우리는 이사할 때 손 '있는' 날을 굳이 고른다. 두어 달 생활비를 훌쩍 넘기는 이사비를 그나마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손 없는 날'이 도대체 뭐길래 돈 깨나 더 주고 이사를 하나 했더니,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는 귀신이 없는 날이란다. 귀신 따위 뭐 대수냐. 없는 살림엔 귀신보다 돈이 더 무섭다.




수평을 맞추는 일.


키가 큰 옷장 두 짝이 속을 썩인다. 문을 열 때마다 불안하게 휘청휘청 하기에 바닥에 나무 조각 두어 개를 장롱 다리에 넣어 주었다. 그래도 문을 열 때마다 여전히 불안한 것이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수평이 안 맞으면 옷장이 뒤틀려 못쓰게 될 수도 있단다. 균형을 잡지 못하면 뭐든 뒤틀리기 마련인가 보다. 나의 생활은 어느 부분을 돋우어야 하려나. 어느 쪽이 낮은가 하고, 장롱 다리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하염없이 잡생각에 빠진다.




버리는 것, 그리고 채우는 것.


2년마다 한 번은 겪어야 할 세입자의 고충. 그래도 덕분에 집안 구석구석 쌓인 쓸데없는 미련들을 한 번에 정리한다. 언제 넣었는지 기억도 없는 냉동실 가득한 음식들이며,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가며 채 버리지 못했던 가구와 잡동사니들. 추억이 가득 담긴 무엇인가를 정리하는 일은 언제나 아쉽지만 동시에 묘한 쾌감을 준다. 물건을 떠나보내는 것으로 새로운 전환의 때를 맞이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만 같다. 한편, 새로운 식구들을 맞이하는 과정도 또 하나의 즐거움. 새로운 공간에 어울릴 만한 것들을 꼽아보니 열 손가락이 모자라다. 버린 것보다 채우는 것이 더 많으려나. 이런, 미니멀리스트의 꿈은 여전히 요원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살의 무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