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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워커 Nov 03. 2023

베이글 한 입 베어 물고 뉴욕을 걷다

여기가 뉴욕 극기훈련장인가요


뉴욕의 첫인상은 축축한 공기와 역한 마리화나 냄새였다.


전날 밤 호텔에 도착해서 7시간 정도 깊게 자고 일어났다. 우리가 묵는 호텔은 맨해튼 교통의 중심지인 그랜드 센트럴역 바로 옆에 있는 하얏트 그랜드 센트럴 뉴욕이었다. 나 혼자 여행이었다면 좀 더 저렴한 호텔을 골랐을 것 같은데 에리카는 뉴욕에선 4성급 미만의 호텔은 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난 나보다 전문가인 사람의 말엔 군소리 없이 잘 따르는 고분고분한 성격이라 그렇다면 에리카 좋은 대로 선택하라고 했다.


에리카는 나처럼 J성향(통제형, 계획형)을 가진 성격이라 이번 여행 일정표를 구글시트로 만들어서 준비했었다. 그중 유독 빡빡한 일정이 1일 차였다.

"우리 오늘.. 할 일이 아주 많네?"

"첫날이 가장 체력이 좋으니까 열심히 다녀야죠!"

내가 바로 전날 밤 9시에 뉴욕에 도착해서 시차적응을 전혀 못한 상태라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해맑은 에리카의 표정. 그래, 까짓 거 죽지는 않겠지 싶은 마음으로 아침 9시에 호텔을 나섰다.

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걸어 다니기에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다음 날부터는 계속 맑다고 했으니까 하루정도 비를 맞는 것도 나쁘지 않지.


호텔을 나오자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맨해튼 거리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마리화나 냄새였다. 대마가 합법이 된 이후 뉴욕의 길거리에선 이 냄새가 끝도 없이 난다고 하더니 과연 그랬다. 누군가는 하수구 냄새 같다고 하던데, 나에겐 아주 습하고 축축한 곳에서 이끼가 썩는 냄새처럼 느껴졌다. 하수구든 이끼든, 적응되지 않는 고약한 냄새임은 분명했다.




첫 식사는 연어 베이글 샌드위치가 유명한 Russ & Daughters였다. 뉴욕의 아침은 베이글과 함께 시작하고 싶었다. '뉴욕 베이글' 이름도 입에 촥 감기지 않은가.

주말 아침인데도 매장 안은 사람으로 가득했고, 우여곡절 끝에 주문을 완료하고 자리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봤다. 와, 그래. 여기 뉴욕이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각양각색의 옷차림과 인종. 해외를 적게 나간 편은 아니지만, 뉴욕의 느낌은 분명 달랐다.


주문한 베이글 샌드위치와 커피를 받아보고 바로 사진을 찍으려던 찰나, 아! 사진을 예쁘게 찍기도 전에 배고픈 에리카가 덥석 베이글을 물었다.

"앗!"

내 단말마를 듣자, 베이글을 입에 가득 문 상태로 에리카가 멈칫하며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다.

"크크. 괜찮아. 편하게 먹어요. 내 거만 사진 찍어두면 돼요."

입을 우물거리며 행복한 표정으로 베이글을 먹는 그녀를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베이글은 생각보다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연어(Lox)는 기대 이상이었다. 다음에 오게 된다면 연어만 따로 사서 먹고 싶단 생각을 했다.

샌드위치 2개와 드립커피 2잔을 위해 낸 금액은 58불. 미친 듯이 오른 환율 덕분에 한화 약 8만 원 정도를 지불하고 나왔다. 와, 이게 뉴욕 물가구나. 우리가 먹은 게 스테이크가 아닌데 무슨 일이람. 이쯤부터 이번 여행에서 돈을 왕창 쓰게 될 거란 느낌을 받았다.


8만 원짜리 브런치 식사를 마친 뒤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뉴욕 여행의 시작이었다.

 

베스트 메뉴라는 연어 샌드위치가 맛있었다. 내가 사진을 찍는 사이 에리카의 베이글은 이미 절반 이상 사라진 후였다.




Russ & Daughters 바로 근처에는 전망대로 유명한 The Edge가 있다. 이 날씨에 전망대에 오는 미친 자들은 거의 없는지, 입구에서 직원들이 실시간 현장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밖에 안 보이니까 올라갈지 말지 선택하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사진 속 전망대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구름 낀 풍경이었다.

우리가 그래도 올라가겠다고 하니, "너네 정말 들어갈 거야? 정말?"이라는 표정으로 우리에게 재차 물었다.

"문제없어. 우린 못 먹어도 Go야."

일정에 여유가 많았다면 다른 날 왔겠지만, 10분의 여유도 허용하지 않는 빡빡한 스케줄표에 The Edge를 끼워 넣을 틈은 더 이상 없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구름, 구름, 구름.

유리 바닥 위로 올라가니까 여기가 운해(雲海)였다.

"크크크크. 진짜 하나도 안 보여."

"그러니까요. 킥킥. 이런 날씨에 오는 사람은 없어서 그런지 텅텅 비어있는 건 되게 좋네요."

에리카와 나는 서로 이 상황 자체가 웃기고 신기해서 더 웃음이 났다.

이것도 추억이지. 오히려 이 날씨에 여기 오른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우린 진귀한 경험을 한 거야! 구름 위를 산책하는 기분을 몇 명이나 경험하겠나 싶었다.


The Edge를 이런 날씨일 때 오른 여행자는 거의 없을 것 같다. 이 또한 추억이라 여겼다.


전망대를 내려오자마자 눈앞에 유명한 Vessel이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위에 올라가서 자살한 경우가 많아 출입이 통제된 건물.

그래서일까.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음에도 왠지 모를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Vessel은 어디서 봐도 눈에 띄는 독특한 건축물이었다.


뉴욕에서 가장 인상적인 길은 The Highline이었다.

서울역 근처에 조성된 서울로 7017이 여기를 벤치마킹해서 만든 곳이라고 하던데, 몇 년 전 서울로 7017을 걸었을 때는 큰 감흥이 없었지만, The Highline은 달랐다. 빌딩 숲 사이를 길게 관통하는 고가도로는 단순한 보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술품이었다. 도시 속의 전시관, 도시 속의 휴양지, 도시 속의 숲을 모두 품고 있는 이 길 위에서는 모두들 복잡하고 정신없는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뉴욕에 살 때는 이런 게 없었는데, 이 거리가 이렇게 바뀔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에리카 역시 반짝이는 표정으로 신기해하는 걸 보니, 늘 비슷한 이미지로 느껴졌던 뉴욕도 끊임없이 무언가가 바뀌는 살아있는 도시라는 게 실감 났다.


The Highline의 매력은 걷는 내내 발견된 설치미술과 벽화들이었다.


The Highline을 빠져나와 유명한 스타벅스 뉴욕 지점 중 하나인 Starbucks Reserve Roastery New York에서 커피를 마실 무렵, 이미 우리의 걸음수는 13,000보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침 9시에 나와서 오후 2시에 이 정도라니. 여행 1일 차부터 자비 없는 스케줄이다 싶어서 웃음이 났다. 그때 마침 내리기 시작한 강한 비바람 덕분에 일단 호텔로 다시 돌아가서 잠시 쉬었다가 나오기로 했다. 여행 중 비바람이 고맙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호텔로 다시 돌아온 이유 중 하나는 비가 내린 덕분에 유독 더 떨어진 기온에 우리 둘 다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초인데도 길가에는 패딩과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흔하게 보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분들도 꽤 있어서, 4계절이 공존하는 묘한 풍경 속에 있다는 게 신기했다.




뉴욕 극기훈련 여행 1일 차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가는 거였다. 여행자들은 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러 간다고 하던데, 우리는 일정이 워낙 타이트해서 뮤지컬이나 뉴욕필 공연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한국에서도 일 년에 두세 번은 교향악 공연을 보러 가는 편이라, 망설임 없이 뉴욕필을 선택했다.


공연 전 저녁식사 P.J. Clarke's Lincoln Square


저녁을 먹고 도착한 링컨 센터(Lincoln Center)에는 이미 어둠이 깔려있었고, 아름다운 조명이 뉴욕의 저녁을 수놓고 있었다.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보자 그 순간 가슴에 시원하고 맑은 바람이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낮 동안 돌아다닌 뉴욕은 축축하고 역하고 시끄러웠다. 길에는 끝없이 차들이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무표정하고 빠른 걸음으로 스쳐 지나갔다. 한국 사람들만 빨리빨리 문화 속에 살고 있나 했는데, 뉴욕 역시 한국 못지않게 사람들 표정에서 여유가 없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러나 링컨 센터에 들어온 순간 뉴욕은 내가 반나절 동안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고요하고 깊고 웅장했다. 광장에 설치된 분수대 옆을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노부부와, 조형물 옆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젊은이의 모습에서 하루 동안 말도 잘 안 통하는 낯선 도시를 걸어 다니느라 긴장했던 마음이 한 번에 가라앉으며 차분해짐을 느꼈다.


링컨센터의 밤


뉴욕 필하모닉 공연 시작 시간은 8시였는데, 7시 무렵부터 이미 로비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로비의 풍경이 무엇보다도 독특했다.

60대 이상의 중년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장소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 우리 둘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뉴욕 젊은 사람들은 이런 공연을 보러 안 와요?"

"음, 보러 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기서 링컨센터에 오는 현지인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대체로 이렇게 연령대가 높아요."

공연 티켓이 십만 원을 훌쩍 넘으니 늘 공연을 보러 오기 어려운 가격대인 건 맞지만, 이렇게나 큰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공연장에는 자녀들과 함께 오거나 연인끼리 데이트를 하러 오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여기엔 40대 조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공연장 안으로 입장하니 또 다르게 느껴지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끼리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하면서 반갑게 인사하며 대화를 나누는 풍경이 펼쳐졌다. 시상식 레드카펫에서나 볼 법한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온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와, 여기가 뉴욕 상류층들의 사교 장소구나.'

우리도 드레스를 입고 왔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했지만,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고 편하게 온 사람들도 물론 많았다. 그렇지만 절반 이상의 관객들은 잘 차려입은 중산층의 분위기를 풍겼다.


공연은 베토벤의 웅장한 곡을 시작으로 스티브 라이시의 곡으로 이어졌다. 그 후 인터미션이 있을 예정이었는데, 곡이 끝나자 모자를 쓴 노인 한 명이 무대 위로 올라와서 지휘자와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는데 스티브 라이시 작곡가 본인이셨다.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공연장에서 만날 일은 없겠지만, 이렇게 교향악 공연을 본 뒤에 작곡가를 직접 만날 일이 얼마나 있겠냐 싶었다. 너무 동네 산책 온 할아버지 같은 차림이셔서 당황스러웠지만 말이다.


다음에는 멋진 드레스를 입고 공연을 보러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오늘 하루 만에도 특이한 경험 많이 했네요."

"그러니까요! 구름이 잔뜩 낀 전망대에 오르고, 10월 초에 겨울 날씨 같은 강풍을 맞고, 뉴욕필 공연을 보러 와서 작곡가를 직접 만나고!"


공연이 끝난 뒤 우버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갈 무렵, 걸음 수는 18,000보를 넘어서고 있었다. 시차 적응 따위 아무 문제없는 부지런한 뉴욕의 하루. 호텔 앞에 도착해서 택시에서 내리자, 다시 아침에 느꼈던 그 습한 마리화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침만 해도 뉴욕은 습하고 축축한 냄새로 가득한 도시였다. 하지만 하루 동안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느낀 뉴욕은 그렇게만 표현하기엔 아까운, 다채로운 매력이 많은 곳이었다.

겨우 하루 만에도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여기 머무는 일주일 간 또 어떤 모습을 보게 될지 설레는 밤이었다.



*[에리카 나랑 브런치 먹으러 뉴욕갈래]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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