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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콘 Sep 08. 2023

[차대왕] 졸본성전투(3/3)

옥저군은 여전히 미동없이 졸본성과 대치 중이었다. 하지만 뒤로 말을 탄 전령들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걸 보며 국왕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애초에 졸본성에 그들이 오래 버티고 있을수록 국왕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인데, 물러나지 않고 공격도 하지 않는 모습이 마치 지원군을 기다리는 것 같은 예감을 주는 것이었다.



지금껏 옥저와 부여의 기미로 보아 그는 한나라가 곧 합류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뒤로돌아 수성의 전투를 관찰했다. 과연 수성은 고구려의 대장군이었다. 그 적은 수로 이미 부여군의 반절을 물리치고 있었다.



국왕은 수성의 적호가 번개 같은 속도로 적 무리를 뚫고 다니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고구려를 향한 수성의 충성심을 넘어설 자가 없는 것은 분명했으나 국왕의 눈에는 그 어떤 알 수 없는 불안 함이 수성에게서 늘 느껴졌다.



그동안 수성에게 홀대를 한 이유도 분명 그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왕이 된 수성이라… 하지만 국왕은 자신이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오늘, 그 끝이 머지 않은 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래 버티긴 했지…’




그는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고구려의 모든 뿌리를 뒤바꾸는 정책을 내새우며 전에 없던 최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순간들이었다.



많은 것들을 이룬 만큼 흘려보냈기에 아쉬움 또한 깊었지만,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짧은 사색을 접고 옆에 대기하던 해치장군에게 말했다.




“수성군에게 후퇴하라 전하라.”




해치장군이 명을 받들어 전달하자 말에 올라탄 전령이 재빠르게 성 밖으로 달려 나갔다.



국왕은 어느새 다시 덩치를 줄여 성벽에 앉아 있던 봉황에게 다가 갔다.




“오늘 선조들의 힘이 많이 필요하겠구나.”




봉황은 국왕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국왕은 위로를 받은 듯 얕게 미소 지었다.



곧 전령과 함께 수성군이 모두 졸본성안으로 들어왔다. 당황한 부여군이 수성을 쫓아오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성군은 편하게 입성할 수 있었다.



수성은 적호에서 내려 국왕에게 예를 갖추어 절했다. 국왕은 수성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고생이 많았다.”




수성은 국왕의 평소와 다른 따스한 말투에 놀랐다. 국왕은 그를 일으켜세우고 지그시 바라본 후 병사들을 시켜 적호를 치료하라 명했다.



그때였다. 땅에 얕은 진동이 느껴진 국왕과 수성은 성벽 위로 올라와 북방을 바라보았다. 이전의 보고와는 달리 족히 오만은 되어 보이는 군사가 북방에서 새까맣게 산을 메우며 접근하고 있었다.



곧 부여군들이 그들에게 다가갔고 합류하는 것이 보였다. 과연 국왕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나라의 지원 병력이였다. 국왕은 옆에 서 있던 수성의 이가 갈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군은 졸본성이 위치한 언덕 아래까지 천천히 진군해 오며 진열을 갖추었다. 위협적인 거리까지 다가온 그들은 그 자리에 멈추었고, 진열 가운데에서 네 명이 운반하는가마에 앉아 있는 한나라의 장군이 나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거대한 곰에 올라타있는 장군이 그와 동행해 나왔다.



가마를 운반하던 이들은 몇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가마를 내려놓았고, 장군은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외쳤다.




“고구려 국왕은 들으라!”




성벽 위의 국왕을 향해 한나라 장군이 말했다. 전장에는 모두가 귀를 기울이느라 정적만이 가득했다. 




“나는 한나라의 양휘라고 한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더 이상의 굴욕은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친히 황제께서 그대를 고구려의 제후로 임명하실 생각도 하시니, 이 어찌 축복이 아니겠느냐!”




성벽 위 국왕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러니 어서 그대는 나와서 황명을 받들라!”




수성이 격분하여 고함치려 하자 국왕이 눈빛으로 그를 말렸다. 국왕은 다시 한군을 바라보았다. 기마에 올라탄 자가 가볍게 손짓하더니 뒤에서 병사들이 누군가의 시체를 들고 와 수성과 태조가 보이게끔 앞에 내동댕이쳤다. 검은 옷의 병사였다. 




“장난질이 많이 늘었더구나! 이번에 몰려온 군은 조족지혈에 불과할 것이다! 그대는 백성을 생각해서라도 옳은 선택을 하라!”




다시 한번 들려오는 적장의 말에 국왕은 피식하며 말했다. 




“감히 오랑캐 따위가 백성을 운운하다니.”




가마에 탄 한나라 장군은 국왕의 반응에 놀라 말문이 막혔다. 미소 짓는 국왕의 동공에 불이 차오르자 그와 동시에 봉황이 그의 뒤에서 날개를 펼치며 덩치가 커졌다. 




“오랑캐는 들으라!”




국왕의 분노한 목소리에 땅이 울리고 성벽이 울려 가루가 떨어졌다. 




“네놈들은 오늘 한 놈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국왕이 팔을 높이 들자 봉황이 힘차게 날갯짓했다. 불이 담긴 봉황의 큰 날갯짓이 한나라를 향해 바람처럼 날아왔다.



단 한 번의 날갯짓에 한군의 대열 앞에 위치한 병사들은 화상을 입어 소리를 질렀고, 가마에 올라타있던 장군은 놀라 팔로 얼굴을 가렸으나 그 옆에 있던걸대한 곰이 울어 봉황의 화풍을 빗겨 가게 했다.



장군은 가마를 들고 있던 병사들에게 어서 가마를 뒤로 후퇴하라 했고, 가마는 황급히 진열 뒤로 물러났다. 국왕이 외쳤다.




“네놈들의 황제에게 목숨이 아깝거든 다신 넘어오지 말라고 똑똑히 전하라!”




화상을 입은 한군들은 불에 달궈진 듯 뜨거워진 갑옷을 벗지도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고, 그 뒤의 군사들은 지금 일어나는 일들에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국왕은 성벽에서 내려와 무장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해치와 수성에게 명을 내렸다. 




“해치장군. 그대가 옥저군을 방어하라. 그리고 수성은 나와 함께 한군을 향해진격한다.”




“명 받들겠나이다!”




한나라 군을 향한 성문이 열리자 국왕과 수성이 군을 이끌고 나와 진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한나라는 화상당한 병사들을 뒤로 황급히 끌어내고 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군을 이끌고 나오는 국왕을 향해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성벽 위에서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린 진당이 태풍을 일으켜 화살들을 방어하고 있었다.



덕분에 고구려군은 졸본성의 고지에서 안정적으로 대열을 갖출 수 있었다. 태풍이 한창이던 때, 봉황에 태풍을 향해 날갯짓을 더하자 태풍에 불이 더해지며 적진을 향해 더욱 빠른 속도로 고지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국왕은 검을 높게 들어 전군에게 준비 태세를 명한 뒤, 검을 앞으로 향하며 병사들과 진격했다.




이에 봉황이 몸집을 키워 졸본 성 주변을 크게 선회하며 지나가는 자리에 화염길이 생겨 적 병력을 둘로 나누었고 불길 안의 적들을 고립 시켰다.



그 후 봉황은 성 반대편으로 향해 옥저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옥저군과 성벽 사이에 불길을 크게 새기고 국왕의 위로 돌아왔다.



수성은 지쳤던 줄도 모르게 현란하게 적진 사이를 오가며 창을 휘둘렀고, 국왕도 봉황의 입김을 받으며 검을 휘둘러 주변으로 불을 계속해서 뿌리고 있었다.



불길 밖의 적군들은 자신들의 뒤에서 화상에 죽어 나가는 병사들을 보며 선뜻 불길 안으로 뛰어들려하지 못했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동료들의 비명 소리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이에 분노한 양휘가 가만히 있는 자는 군법으로 사형에 처하겠다 외치니 억지로 병사들은 불길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제대로 불길을 뚫지 못한 병사들의 시체들이 불길을 덮고 있었다.



한창 아수라장이 이어지던 찰나 수성이 타고 있던 적호가 무언가에 크게 들이받혀 나가떨어졌다. 적호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은 수성이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며 누군지 확인하자, 거대한 곰을 타고 있던 한나라의 아까 그 장수였다. 그 장수는 곰에서 내리며 수성에게 말했다.




“네놈이 그 이름난 장수, 수성이구나.”




수성이 창을 쥐고 자세를 취하자 적호도 몸을 일으켜 그의 옆에서 곰을 향해 으르렁댔다. 




“내 이름은 사마평이라고 한다. 네놈의 목을 따러 왔다.”




수성은 이미 하루 종일 치른 전투로 인해 탈진 직전이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제정신으로 싸우는 것 같지 않았다.



적호 또한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피로 온 털이 물든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사마평은 양손으로 자기 화극을 고쳐잡고 수성을 향해 돌진했다.



엄청난 힘이 수성의 창을 연이어 찍어내리며 수성을 뒤로 밀어냈다. 간간이 수성의 병사들이 사마평에게 달려들었으나 한 번의 합도 이겨 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그사이 적호는 거대한 곰과 물어뜯고 뜯기는 싸움을 하는 중이었는데, 곰이 두 발로 서서 내려찍는 앞발의 힘에 적호도 쉽사리 제대로 된 공격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힘에 밀린 수성은 사마평의 공격을 막아 내기 급급해 땅에 주저앉게 되었고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사마평은 수성이 온전한 상태였어도 호각을 다퉜을 정도로 강한 상대였다.



결국 계속해서 막아 내던 수성의 창은 사마평의 화극에 반 토막이 나버렸고 수성은 이어지는 사마평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수성은 배를 움켜쥐며 적호를 찾았는데, 적호는 이미 한편에 숨을 헐떡이며 축 늘어진 채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짐승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결국 무자비한 짐승의 이빨이 적호의 목을 뚫었을 때, 적호의 동공은 짧은 찰나에 수성을 바라본 후 위로 돌아가며 흰자만을 보였다. 적호가 죽었다.



수성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곰이 적호의 목을 문채 두 발로 서며 적호의 목뼈를 꺾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마평은 수성에게 다가가 화극을 높이 들어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그때였다. 봉황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크게 메우더니 졸본성을 향했을 때만큼 커진 봉황이 전장의 하늘 위에 떠 있었다. 국왕은 고구려군에게 퇴각하라 명하면서 말을 타고 수성을 향해 달려왔다.



사마평은 표정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으나 하늘에 떠 있는 봉황의 기세에 적잖이 놀랐다.




“이게 말로만 전해 듣던 고구려의 그 봉황이로구나…”




그는 붉은 하늘을 감상하다가 멀리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말에 탄 황금 갑옷을 발견했다. 그는 곧 화극을 고쳐잡고 국왕을 단칼에 베어내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국왕이 거리가 적당히 가까워졌을 때 봉황을 향해 칼짓하자 봉황이 거대한 몸집으로 하늘 위로 솟았다가 크게 돌아 멀리서 전장을 향해 낮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고구려군들이 다 퇴각하고 한나라군만 남은 전장 위를 빠르게 지나가며 그곳을 불로 메웠다. 사마평은 봉황과 함께 불길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국왕을 쳐야 할지, 일단 불길을 피해야 할지 고민했다.



결국 그는 곰의 등 뒤로 숨었고 그 덕분에 국왕은 수성의 곁에 말을 세우고 수성을 태울 수 있었다. 곰은 봉황의 불길을 막기 위해 우렁차게 울어댔고, 국왕은 달아날 시간을 더 벌기 위해 봉황에게 곰을 향해 날갯짓하게 했다.



제아무리 덩치가 큰 무자비한 짐승이었을지라도, 결국 곰은 크게 화상을 입으며 주인을 가까스로 지켜낸 후 전신에 화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할 일을 마친 봉황은 멀찌감치 달아나는 국왕을 향해 날아갔고, 불길로 가득한 전장에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자는 곰의 등 뒤에서 겨우 버텨 낸 사마평 뿐이었다. 




국왕이 수성을 뒤에 앉힌 채 성안에 도착했을 때, 해치장군과 진당이 옥저군을 거의 괴멸시킨 상태였다.



좀 전에는 공성전에서 겨우 자리를 지켜내며 물밀듯이 들어오는 적들을 처리하기에도 벅찼던 해치장군이었지만, 진당이 도술로 불러내는 태풍에 힘입어 비교적 큰 피해 없이 옥저군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진당의 도술이 성공적이었던 덕분에 두 사람은 국왕과 수성의 퇴각을 지원나갈 수 있었다. 해치장군은 성문밖으로 약간의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국왕이 성안에 무사히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말에서 내린 수성은 분함과 서러움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몇 번이고 내려치며 울먹거렸다.



그는 병사들에게 바깥에 내동댕이 쳐져 있는 적호의 시체를 가져오라 고함쳤고, 서른 명의 병사들이 황급히 뛰어나가 적호를 수레 세 개에 걸쳐 싣고 돌아왔다.



선조로부터 전해내려온 영물이 자신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수성에겐 너무도 큰 고통이고 치욕이었다. 그가 정신없이 화를 쏟아 내는 동안 국왕은 진당의 부축을 받으며 말에서 내렸다. 왕은 말에서 내린 후,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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