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일럽의 오열이 잦아들고, 트레일러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서연은 퉁퉁 부은 눈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케일럽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 위로의 말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저주를 끊어낼 확실한 방법뿐이었다.
서연은 다시 빌리의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 장, 떨리는 필체로 급하게 휘갈겨 쓴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나코마(Nakoma). 바람의 목소리를 듣는 자. 페코스 강 서쪽, 붉은 협곡의 끝.]
"나코마..." 서연이 이름을 읽자, 케일럽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본 적 있어요. 할아버지가 가끔 언급했던... 부족의 옛 주술을 기억하는 마지막 샤먼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가 아직 살아있는지, 정말 그곳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가봐야 해요." 서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우린 선택권이 없어요. 빌리 할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희망이에요."
두 사람은 곧바로 낡은 픽업트럭에 몸을 실었다. 공사 현장의 흉흉한 기운을 뒤로하고, 그들은 서쪽으로 향했다. 텍사스의 풍경은 갈수록 황량해졌다. 거대한 선인장과 앙상한 관목만이 드문드문 박혀 있는 붉은 대지는 마치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처럼 낯설었다.
네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붉은 협곡'의 끝자락. 그곳에는 문명과 단절된 채 홀로 서 있는 낡은 판잣집 하나가 있었다. 집 주변에는 동물의 뼈와 깃털, 그리고 모양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조각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기묘한 공명음을 냈다.
딸랑... 텅... 휘이잉...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그 기괴한 풍경소리뿐이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계십니까? 나코마 님을 뵙러 왔습니다." 케일럽이 조심스럽게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그때였다. 판잣집 앞 흔들의자에 앉아 미동도 없이 먼 산을 바라보고 있던, 마치 풍경의 일부처럼 보였던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짙은 갈색 피부에 깊게 패인 주름, 백내장으로 하얗게 탁해진 한쪽 눈. 하지만 나머지 한쪽 눈은 독수리처럼 형형하게 빛나며 두 사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배신자의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노인의 첫마디는 비수처럼 날아와 케일럽의 가슴에 꽂혔다. 케일럽이 멈칫하자, 노인은 쇳소리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후회의 눈물 냄새도 섞여 있구나. 들어오너라."
나코마였다.
판잣집 내부는 외부와는 딴 세상이었다. 알 수 없는 약초 타는 냄새가 진동했고, 벽면 가득 기이한 문양의 태피스트리와 짐승의 가죽들이 걸려 있었다. 나코마는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지도 않고, 화로 불씨를 뒤적이며 입을 열었다.
"빌리는... 결국 실패했지." 서연이나 케일럽이 입을 떼기도 전이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친구는 너무 급했어. 죄책감이 눈을 가렸지. 혼자서 그 거대한 분노를 감당할 수 있다고 믿은 게야."
서연이 다급하게 물었다.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 악령을... 없애버릴 방법을요. 붉은 흙이 괴물로 변해서 사람들을 해치고 있어요. 더 이상의 희생을 막아야 해요."
나코마가 고개를 저으며 서연을 바라봤다. "이방인 아가씨. 자네는 태풍을 칼로 베어 없앨 수 있나? 지진을 총으로 쏴서 멈출 수 있나?" "네...?" "그건 이제 '죽은 자의 영혼' 따위가 아니야. 수백 년간 쌓인 피와 원한이 이 땅의 흙, 바람, 열기와 섞여 만들어진 거대한 자연재해 그 자체다. 없앤다는 건 불가능해."
서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퇴치할 수 없다면, 이대로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럼... 어쩌죠? 방법이 없는 건가요?"
나코마는 화로에서 불타오르는 숯덩이 하나를 집게로 집어 들었다. "불을 없앨 수 없다면, 번지지 않게 가둬야지." 그는 숯덩이를 흙으로 빚은 작은 항아리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타오르던 열기가 순식간에 차단되었다.
"'영혼의 덫(Soul Trap)'을 놓아야 해."
"영혼의 덫이요?" 케일럽이 되물었다.
"그래. 놈을 유인해서 다시 붉은 흙 속으로 깊이 잠재우는 의식이다. 빌리가 하려다 실패한 것이 바로 그것이지." 나코마는 탁한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다. 빌리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너희 둘이 있으니까. 덫을 완성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그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첫째, 놈의 분노를 유인할 미끼. 바로 배신자의 핏줄이다." 나코마의 손가락이 케일럽을 가리켰다. "네가 미끼가 되어야 한다. 놈은 네 냄새를 맡으면 이성을 잃고 덤벼들 게야."
"둘째, 놈을 묶어둘 사슬. 추장의 유물이다. 붉은 매가 생전 지니고 있던, 아직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힘이 깃든 물건이 필요해."
"그리고 셋째..." 나코마의 시선이 서연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놈을 가둘 뚜껑. 이방인의 순수한 의지다. 이 땅의 원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직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덫의 문을 닫을 수 있다."
서연은 침를 꿀꺽 삼켰다. 그것은 자신을 뜻하는 것이었다.
"명심해라." 나코마의 목소리가 낮고 엄숙하게 깔렸다. "덫은 단 한 번만 작동한다. 놈은 교활하고 강력해. 실패하면 너희 둘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겨 붉은 흙의 일부가 될 것이다. 빌리나 마크처럼 곱게 죽지도 못할 게야."
서연과 케일럽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물러설 곳도 없었다. 케일럽이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끄덕였고, 서연 역시 입술을 깨물며 나코마를 향해 결의에 찬 눈빛을 보냈다.
"하겠습니다.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세요."
판잣집 밖, 앙상한 뼈들이 부딪치는 풍경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곧 닥쳐올 폭풍을 예고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