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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담 May 13. 2016

나 그대 대단치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오

#강아솔 #그대에게

어느새 가을이다.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가을앓이'를 한다.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트렌치코트를 여미고 길가에 떨어진 낙엽을 구둣발로 괜히 한번 쓸어보면서 홀로 고독하게 사색에 잠기는, 그런 앓이는 아니고 감기에 걸려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요란하게 재채기를 해대는 것이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오랜만에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지난번에 글을 쓰려고 끙끙댔던 것이 8월 말이었으니 한 달이 조금 지난 셈이다. 그간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지만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문득 글을 쓰고 싶다기보다 못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써야만 한다는 강박에 내 것이 아닌 언어들을 억지로 짜깁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무엇이든 써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언가를 쓰는 것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인 양, 무엇이라도 쓰지 않으면 내가 그냥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쓰고 싶다는 것, 혹은 써야만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두려움에 찬 겁쟁이의 절박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몇 해 전 가을, 복학하여 두 번째 학기를 맞는 나의 심정은 자못 비장했다. 전역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의기양양함은 사라진 지 오래고, 남들은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는데 나만 혼자 뒤쳐져 있다는 패배감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험난한 복학 첫 학기를 보낸 터였다. 그때는 내가 그렇게 슬펐다. 보잘 것 없는 내가 싫었고 가진 것 없다고 힘들어하는 나약한 내가 미웠다. 그 길고 어두웠던 터널을 지나오면서 내가 나름대로 구한 결론은, 나란 인간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지만 노력하는 나는 분명 가치가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 해 가을에 콧물을 훌쩍대고 재채기를 하며 나는 그런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다.


'노력하는' 나만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연애할 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은 그냥저냥인데 잘해주니까 만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앞에 따라붙는 관계. 이는 인간관계에 있어 자신에게 돌아오는 실익만을 따지는 셈법이나 실용적인 것만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마음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어쩌면, 평소에는 멸시하고 배척하려고 애썼던 이런 생각들을 정작 나 자신에게 들이대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나를 학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얕은 물에 빠진 것도 모르고 두려움에 온몸을 허우적대다가 어느 순간 바닥에 발이 닿는 것을 발견하는 어리숙한 소년이 된 기분이다.


강아솔 - 그대에게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오히려 쓰지 않을 수 있는 용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설뜬 언어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전에 스스로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언뜻 보기에는 보잘 것 없고 쓸모없다고 하더라도 그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믿음. 노력하는 내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도 충분히 소중하다는 마음.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실은 가장 빛나는 것이듯이, 미약하나마 나도 빛나는 존재라는 것.


여전히 가을에는 트렌치코트를 여미고 낙엽을 구둣발로 쓸어야 할 것만 같고, 늘 그랬듯 나는 콧물을 훌쩍거리고 요란하게 재채기를 한다. 그럼에도 가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대 대단치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고 속삭여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런 보잘 것 없는 것이 실은 가장 큰 위로가 된다는 것 때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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