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취주에 관하여. 2
웃을 때 보이는 덧니가 아주 매력적이었던 그 남자는, 막 동장군이 위세를 떨치기 직전인 11월 초순 어느 쌀쌀한 저녁에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교차가 큰 탓에 얇은 외투 하나 덜렁 걸치고 다니는 술꾼들이 옹기종기 훈훈한 술자리를 찾아 헤매는 저녁과 밤의 경계 시간이었다. 가게는 적당히 한적했고, 나는 처음 보는 그 얼굴에 경계심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다가갔다.
그는 바에 아주 익숙한 사람으로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스카치블루 17년을 주문했다. 세팅을 준비하는 동안, 느긋하게 담배에 불을 당겨 붙이는 그의 첫인상은 썩 좋은 것이었다. 서른 너 댓살 정도, 캐주얼한 복장에 호감 가는 인상. 자연스럽게 걸려있는 만면의 미소.
나의 경계심은 대부분 허물어 졌고, 골칫거리를 판별해주는 ‘촉’은 뒤편으로 물러앉았다.
대신에 기대감, 어쩌면 즐거운 대화로 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감이 올라왔다.
그리고 약 삼십 여분이 지나고, 나는 얼굴 안쪽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매우 호감 가는 인상의 이 남자는 상당한 수다쟁이였고, 또 그 수다의 대부분을 자신에 대한 자랑으로 채워나가는 그런 타입이었다.
방송국 일을 한다는 그는, 방송국 관계자나 연예인들과 친분이 깊다는 것을 자랑하고 스스로 나이에 비해 경험이 많으며 생각이 깊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처음 몇 십 분 동안은 예의로써 대화 상대인 나에 대해 호기심이 있는 척 질문도 하고, 경청하는 시늉도 내었으나 결국은 일방통행인 대화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만 달릴 수 있는 도로에서 그는 신나게 운전을 하였고, 나의 역할은 신호등에 불과했다. 그것도 파란 불 밖에 켤 수 없는 고장 난 신호등.
그러나 어디 그런 손님이 이 사람 하나뿐이랴. 그는 돈을 지불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들어 줄 사람을 산 것이고, 나는 이 시간 그가 지불하는 값만큼 그 역할을 다 하면 그 뿐이다. 그래도 그 긴 시간 그는 사근사근한 어조와 존대로써 나를 존중하여 주기는 하였다.
그렇다. 그는 특별히 나쁜 손님은 아니었다. 좋은 손님이라고 분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이 시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다면 말이다.
그러나 잠시 전화를 한다고 자리를 뜬 그는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근거 없는 자랑질과 헛소리에 시달렸던 나는 약간 지친 상태였고, 그의 정신연령은 의심하였으나 범법성까지 의심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그렇게 허무하게 그 남자를 보내 버렸던 것이다.
그 것이 이 남자와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이를 갈았지만 어찌하랴. 그냥 잊어버리는 수밖에. 다행이 당시의 매니저는 매우 너그러운 사람이었고, 직원으로써 나를 매우 신뢰하였기에 이 실수를 그저 웃어넘겨 주었다.
“장사 오래 하다보면 한 두 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며칠 동안 분함을 품고 살았으나 당분간뿐이었다. 그가 아니더라도 나를 괴롭히는 손님들은 꾸준히 출몰하였고, 그런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면서 평범한 바텐더의 나날을 보내다 보니 그 남자도 결국 기억의 지층 밑바닥으로 사라져 갔다.
그 후로 일 년이 좀 안되었었나.
그가 다시 돌아왔다.
처음에는 몰라봤다. 그저 낯이 익네? 하는 생각? 수많은, 가게에서 거쳐지나갔던 손님 중 하나 갰거니, 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자동적으로 불쾌한 느낌이 번져오면서 ‘촉’이 곤두섰다.
스카치블루 17년이 나가고, 세팅을 하고, 인사를 하면서 미소 지을 때 드러나는 매력적인 덧니를 보며 데자뷰를 느끼고... 그리고
“방송국에서 일해요. 아니 직원은 아니고 프리랜서 같은 거죠.”
이 부분에서 모든 기억이 송두리째 살아났다. 아 이거 그때 그 개새끼네.
다행이 나는 감정을 잘 숨기는 재주가 있다. 마음속은 그때의 분노와 다시 이 가게를 찾은 그의 뻔뻔스러움에 대한 감탄, 그리고 앞으로 그가 행할 짓거리에 대한 불안으로 요동쳤으나 내 얼굴은 (내 생각으로는) 꽤 평온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였고, 어쩌면 그렇게 토씨하나 틀리지 않는 자기자랑과 허세, 마치 시간을 되돌린 착각이 들 정도로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대본을 외우고 반복적으로 무대에 서는 연극배우 같은 희한한 인물이었다. 그 행동, 말투도 상당히 꾸민 듯 연극적 요소가 다분했다.
어쨌든 나는 그의 말을 매우 신기하게 듣는 척하며(어머, 정말요? 우와 멋진 분이시네요.) 머릿속으로는 그의 행동에 대한 대처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일단 중간 중간 자리를 비우며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 먹튀. 이 새끼 먹튀야.
- 대박! 언니 어떻게 해요?
- 일단 긴장 풀지 말고 좀 신경 써서 지켜봐줘
- 문 쪽으로 가면 다들 쫓아나갈 준비하고.
당시 가게에는 매니저가 없었고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바생이거나 직원이었다. 너그럽던 그 매니저가 그만둔 후 사장은 가게에 방문하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알아서 하도록 자율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는데, 대신 가게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들도 일정부분 바텐더 들이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 말인즉슨, 먹튀가 발생하여 술값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을 때, 그 손해를 당시 일한 바텐더들이 메꾸어야 했다는 말이다.(아주 불합리하고 불법적인 규칙이다!)
시급으로 연명하는 바텐더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규칙이었기에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술병의 술이 3분의 일쯤 남았을 때 그가 행동을 개시했다. 슬슬 주변을 살피고, 맥락 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산만한 행동을 하였다.
처음에는 눈치 채지 못했던 징조였지만 이때는 분명히 보였다. 나는 미리 예견할 수 있었으나 상황은 나에게 더없이 불리했다. 가게에는 이날 따라 손님들이 가득하여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바텐더는 없었고, 디귿자 형태로 된 바의 중앙부분에 위치한 그가 도망을 간다면 빙 돌아서 그를 쫓아가야 하였기에 시간적으로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그가 그 때처럼 전화기를 들고 일어섰고, 나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입문 쪽으로 가는 그를 천천히 쫓아갔고, 출입문 쪽에서 그는 전화를 받는 척 잠시 서성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문을 열고 튀었다.
2층에 위치한 바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그를 따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렸다.
건물의 출입구에 내려서자 건물 뒤쪽 주차장이 있는 공간으로 달리는 그를 보았다. 운이 좋았다. 그는 내가 뛰어내려올 것을 예상 못하고 잠시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있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 유유히 갈 길을 갈 예정이었던 모양이다.
그 주차장에는 출입구가 하나였다. 그가 내 눈을 속여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는 없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어두운 주차장, 그 먹튀새끼가 들어간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