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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ish May 18. 2019

당신에겐 존경하지 않지만 고마운 선배가 있나요.

'존고선배'를 정의하다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어느새 일에 능숙해진 9년차 직장인이 됐습니다. 하지만 신입사원 때 제 기억은 지옥에 가까웠습니다. 회사 내에서 성질이 고약하기로 알려진 A 선배가 사수였거든요.


어느 정도였냐고요? "이 정도 일 처리도 못 해?" "너 같은 애를 왜 뽑았는지 모르겠다"는 약과였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깔아 뭉개는 폭언도 자주 있었지요.


애써 공을 들인 원고를 넘길 때면 "넌 글 구조가 흐리멍텅하다"라는 식의 피드백을 주곤 했습니다. 공들인 10매짜리 제 원고지의 절반 이상을 날린 뒤 "헛소리 지껄일래?"라는 지적을 받면 저도 모르게 퇴사 욕구가 들곤 했지요.


그런데 회사 내에선 A 선배에 대한 평이 하나 있었습니다.


누구 인정할 만큼 유능하면서도, 후배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는 것이었지요.  1년차 직원에게 4~5년차 수준의 실력을 기대하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정신적 괴로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정도의 능력치를 짧은 시간에 발휘하는 거였지요.


하지만 후배 된 입장에서의 비좁은 시각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당장 그 상황에서 버텨야 하겠단 생각이 들 뿐이었습니다. '그 선배의 기대치를 어떻게 충족시켜야 할까'라는 깊은 고민 없이 말이지요.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고통과 버팀. 그렇게 1년이 지났습니다. 전 인사이동이 돼 A 선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요. 감정적으로 다칠 일이 더이상 없으니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디 떠나는 제게 A 선배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네게 그동안 수준 높은 업무를 맡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너였다면 어떻게든 수준을 업그레이드시키려고 애썼을 거다." 그와의 대화는 이 한 마디가 마지막이었지요.


상황과 판단에 따라 A 선배는 완전 꼰대일 수 있고, 많고 많은 호랑이 선배 중 한 명일 수 있습니다. 신입사원에게 업무 지시 과정이 가혹했던 것 역시 사실이지요.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내 자신이  선배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였냐는 니다.


A 선배가 당시 신입사원이던 제게 마음의 상처를 안긴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만약 내가 A 선배의 기대 수준에 맞추기 위해 전력(全力)을 다했다면 당시의 내 실력은 더 크게 올라가지 않았을까.


뒤집어 생각해보면,  A 선배 같은 사람은 후배에 무관심한 선배들보다는, 차라리 더 나은 선배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후배의 가능성을 끌어주기 위해 나름의 혹독한 훈육을 펼쳤기 때문이지요.


후배의 단점을 세세히 파악하려 들고,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 고민하는 선배는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후배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인격이 고루 좋다면 더 좋았겠죠!)


역설적인 사실은, 그렇게 지독했던 그때의 A 선배가 요즘따라 유독 기억에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와 비교도 안될 만큼 나아진 지금의 제 자신에게, 의지 미약이었던 당시 제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리면서 말이지요.


이젠 먼 기억 한켠에 놓인 A 선배와 같은 사람들은 제겐 존경하지 않지만 고마운 선배가 됐습니다. 이른바 '존고선배'이지요.


당신에게도 존고선배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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