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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ish May 27. 2019

퇴사와 이별은 하나다

적성 버리고 전직한 내가 겪은 '상실 장애'란?


직장인으로 저는 참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대학생 시절부터 꼭 하고 싶던 직업인 기자를 했으니깐요. 꼬박 8년 간을 언론업계에 몸담은 저는 최근 다른 업계로 옮겼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로 전직을 한 것이지요.


전직(轉職): [명사] 1. 직업이나 직무를 바꾸어 옮김.


직무가 바뀌는 것은 단순히 직장이 바뀌는 것과는 큰 차이입니다. '기사 작성'이 직무라고 한다면, A 신문사에서 B 신문사로 이직하는 것은 직무에 변화가 생기지 않지요. 여전히 제 업무는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거니깐요.


하지만 A 신문사에서 C 대기업으로 옮겨 '언론 대응' 업무를 새로 하게 된다면 이는 직무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사실상, 생활양식에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전직 한 달. 갑작스러운 변화 때문이었을까요. 심리적 부담이 파도처럼 몰려왔습니다. 퇴근시간이 앞당겨진 데다, 생활의 질까지 좋아졌지만, '난 왠지 기사를 써야 할 것 같다'는 심리적 욕구가 하루 종일 제 머릿속을 지배했습니다.


제 또래 가운데 언론업계에 몸담은 이들이 쓴 글을 읽을 때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곤 했죠.


'나 역시도 이들처럼 기사를 썼었는데…'. '나도 기자였는데….'


옛 직무에 대한 미련, 대학생 시절 꿈을 버렸다는 일종의 죄책감, 제 퇴사를 만류하던 전(前) 직장 상사에 대한 미안함 등이 뭉쳐 저서 하나의 후유증처럼 된 것입니다.


결국 저는 심리 치료사를 만나게 됩니다.




"당신만 이런 이런 증상을 겪는 건 아니에요. 적성에 맞는 일을 했다가 전직 등으로 갑작스럽게 일상이 바뀐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걸 '상실 장애'라고 불러요."


상실 장애. 마치 주변인을 잃는 듯한 심적 아픔을 주는 심리 상태라고 심리 치료사는 설명했습니다. 그의 말은 이어졌습니다.


"마치 연인과 헤어졌을 때의 심리 상태라고 할까요. 후회, 미련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맴돌며 일상을 지배하죠. 당신의 아침잠을 깨우는 건 시계 알람이 아니에요. 어두운 감정과 불안한 심리 따위죠. 결국 당신은 현실과 과거 사이에 갇혀 지내게 되는 거예요."


심리 치료사의 말이 맞다면, 나는 '적성'보다 '현실'을 찾은 것에 대한 심리적 비용을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흥미롭게도, 연인을 잃어버린 심리 상태와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죠.


"왜, 그런 말 하잖아요. 연인을 1년 간 만났다면 약 1개월은 아무도 만나지 않는 거, 2년이라면 2개월. 이를 옛 연인과의 시간을 존중하는 의미라고 하지요. 어찌 보면 사랑했던 직업과 헤어지는 과정도 비슷해요. 옛 직업을 충분히 사랑했던 시간에 대한, 일종의 조문 기간을 보내고 계신 거죠."


이쯤 되니 그가 심리 치료사인지, 연애 상담사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커리어에서 적지 않은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더 높은 만족감을 누리기도 하고, 뼈아픈 후회를 하기도 하지요. (※그 선택을, 돌이킬 수 있느냐 없느냐 여부는 이 글에선 별론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개개인의 결정은 상황과 맥락이 다르지만, 특히나 전직이라는 것은, 업무상 적성 만족을 보장하기 어습니다. 그래서 전직 초창기에 개인이 겪어야 할 심리적 변화가 적지 않지요. 


평생직장과 평생 직업이라는 개념이 희미해진 요즘 세상에선, '상실 장애'와 같은 일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심리적 아픔일 것입니다.


그게 일시적인 동시에, 심리적 상처가 아물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린 순간순간을 버티면서 사는 것이죠. 결국, 세상에 정답은 없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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