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상희 Aug 14. 2023

[프롤로그] 울적한 당신에게, 이 영화.

영화 속 그녀에게 배운 결핍을 껴안는 법

포기않고 살아있는 한, 삶이란 이야기는 고쳐 쓸 수 있다. 

영화 속 그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건 내 이야기고, 당신의 이야기다. 사랑받고 싶었던 울적한 여자애가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조금 좋아하게 된 이야기이기도 하고. 


21살, 고향을 떠나 서울에 갔다. 대학교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구수한 밥 냄새, 따스한 엄마 품,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그리웠다. 그러나 내게 이 방 아닌 다른 방은 없었다. 나는 사람 목소리가 울리게 영화를 틀어두다 잠들었다. 영화가 텅 빈 나를 재워주었다. 혹은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을 잔뜩 블로그에 써 올려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22살, 낯선 땅에서 살아남으려 친구들을 만들 수 있을법한 동아리 여럿에 들었다. 함께 모여 떡볶이나 라면 따위를 끓여 먹던 동아리 친구들 몇몇이 연애를 시작한다. 그 애들이 하는 말도, 치장한 모습도 모두 낯설어졌다. 동아리를 하며 마음에 담은 남자애는 있었지만 무슨 말을 걸어야 할 지도 몰랐다. 연애란 게 궁금해서, 남자의 마음이 궁금해서 더 열심히 영화를 보던 날들.


  23살, 학교 밖으로,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영화제 데일리팀 자원활동가를 신청했다. 거기 가면 나랑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도 나누고,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고, 귀여운 남자애가 있지 않을까? 순수하게 영화가 좋아서 온 애들 사이에 앉아 그런 마음을 애써 숨기면서 앉아있었다. 그런 남자애는 없었다. 대신 상업 영화를 넘어 독립영화니 다양성 영화니 예술, 실험 영화니 하는 것들을 실컷 보고 알게 된다.


  26살, 졸업을 하고 잠시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말 그대로 가슴이 미어지게(심장을 꾹 잡고 흔드는 듯, 칼로 저미는 듯) 아픈데도 죽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방송이란 매체의 ‘우세요’, 하고 노래를 광광 틀어주고 ‘이제 웃으세요’, 하고 자막을 빵빵 틀어주는 부자연스러움이 마음에 안 들었다. 다시 영화를 보고 싶었다. 영화제 스태프로 2년간 일하다 결국 가장 좋아하는 건 일보단 취미로 남을 때 아름답다는 생각에 이른다.


  27살, 영화제를 그만두고 다시 취준을 하던 시절, 나답지 않게 술을 잔뜩 먹고 얼결에 한 키스가 첫 키스가 되었다. 그건 영화에서 본 것들과는 너무나 다른, 끔찍하고 알 수 없는 축축한 감각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연애란 걸 알지도 모르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여자애로 살아간다. 연애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을 몇 번 겪었고, 그 사이의 진통이 지독했다. 빈 마음을 견디는 대신 오물을 욱여넣은 죗값으로 우울과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그런 날이면 혼자 작은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며 꺽꺽 울었다. 걱정할 부모님에게 말할 수도 없고, 쪽팔려서 친구들에게도 한 번 이상은 말할 수가 없었던 이야기들을 부여잡고 영화 속 여자들과 나를 겹쳐봤다. ‘너도 나처럼 지질하네’, ‘너는 나보단 덜 답답하네’, ‘언니는 정말 쿨하고 멋지네요, 나는 언제 한번 그런 사랑을 해 볼까요.’ ‘언제 한번 그렇게 시원하게 내 마음을 말해볼까요.. 언제 을이 아닌 사랑을 해볼 수 있을까요..’ 혼잣말들을 하면서 영화에 빠져들었다. 그 시간 만큼은 우울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물아홉이 되었을 때, 나는 누구를 내 빈 마음에, 빈방에 초대해야 할지 겨우 알기 시작했다. 내 사랑은 아주 따스하고 몽실몽실하고 커다란 것이며, 그런 내 사랑을 받아도 좋을,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을 알아볼 눈을 가지는 게 먼저란 것을. 그것은 모두 영화 속 그녀들이 내게 알려준 것들이다. 결핍을 가진 사람, 그래서 타인의 결핍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찾으라고. 내 탓이 아닌 일이 휘몰아쳐서 무릎이 꺾이더라도, 결국 내가 내 삶을 다시 쓰는 사람, 다시 살아보기로 하는 사람을 찾으라고 말이다. 그보다 먼저 그런 사람이 되라고, 그리고 그런 사람의 손을 잡으라고 그녀들은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결국 그토록 바라던 한 사람을 만난다. 그 뒤에 이 글들을 추려서 세상에 내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여전히 우울감은 노크없이 툭툭 방문하지만, 같이 잘 지내다가 배웅하며 보내는 법을 알게 됐다. 평생 가지고 가야 할 병을 안고도, 일단 오늘 날씨가 좋으면 오늘을 즐겨야 한다며 웃는 한 사람을 만나면서. 내게 '영화 속 그녀들'이 그랬듯, 삶을 다시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 한 사람을 발견하게 해 준 '그녀들'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영화 속 그녀들은 밖에서 오는 사랑만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진 말라고, 사랑 이전에 혼자서도 잘 지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녀들의 지혜와 결핍에 맞서는 삶의 태도들을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니까, 이렇게 쓴다. 이 글들이 방 안에서 영화를 틀어두고 엉엉, 흑흑, 훌쩍, 혹은 꺼이꺼이 울고 있는 당신에게, 열심히 달렸지만 넘어져 깨진 무릎을 껴안고 우는 당신에게 닿기를 바라며 서문을 연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