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원 Aug 21. 2023

<백엔의 사랑> : 자신을 미워한 날들에, 어퍼컷!

영화 속 그녀에게 배운 결핍을 껴안는 법

  “계속하다 보면 나아져요, 언니.” 복싱장에 등록한 지 일주일째였다. 복싱선배인 중학생 여자애가 헥헥거리는 나에게 말했다. 그 애는 입매도 몸피도 다부졌다. 그 말을 믿고 계속 제자리 뛰기를 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찼다. 이제는 변해야만 했다. 뭔가를 오해한 상사가 나를 쏘아붙일 때 어버버버 하고 싶지 않았다. 야근과 폭식에 물러터진 몸을 그만 미워하고 싶었다. K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애매한 태도에서 뭔가를 기대했던, 미련한 내 얼굴에 한 방 먹이듯 허공을 찔렀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나는 남은 생 내내 잘못한 타인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겠구나’ 복싱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면 이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백엔의 사랑>의 이치코가 그랬던 것처럼.



[복싱장에서 다시 태어나다]

  이치코, 그녀에겐 꿈이 없다. 스스로를 포기해 버려 욕망도 없다. 엄마 집에 얹혀살며 홈비디오게임으로 시간을 죽이는 게 일상이던 그녀에게 사건이 일어난다. 보다 못한 동생이 그녀를 내쫓아 어쩌다 독립을 시작하게 된 것. 그녀는 편의점에 일자리를 구하지만, 그곳의 동료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이후 그녀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 동네 복싱장에 등록한다. '그 주먹으로 세계를 뚫어라.'는 문장이 대문짝만 하게 붙어있는 복싱장에서 이치코는 자신의 세계를 허문다.


 내가 기다리는 일도, 나를 기다리는 것도 없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던 그녀의 걸음이 반짝 멈추던 곳. 그게 복싱장 앞이었다. 한 남자가 미친 듯이 샌드백을 치고 있다. 세상에 샌드백과 자신밖에 없는 것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시원해질 만큼 땀에 흠뻑 젖어서. 아마도 이치코는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신을 미워했던 과거를,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내버려 뒀던 과거를 그처럼 미친 듯 때려 부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홀린 듯 빠져들어 봤던 복싱장의 남자, 카노가 우연히 이치코가 일하는 편의점에 들르고, 둘은 동거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카노는 이치코를 웃게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웃음이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당신이 좋아.'라는 당당함 보다는 '이런 나 따윌 사랑해 줘서 고마워' 란 비굴한 웃음에 가깝다. 복싱으로 단련을 시작한 그녀지만, 30년 넘게 방치해 온 마음에 근력이 단박에 붙진 않을 터.


[“이겨서 승자가 되고 싶었어. 단 한 번이라도 이겨보고 싶었어.”]

 어느 날, 카노는 두부 파는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 이치코는 분노를 연료 삼아 샌드백이 너덜 해지도록 연습에 매진하고, 복싱 선수권 시합날이 다가온다. 결전의 날, 강력한 상대를 만난 그녀는 KO패를 당하고 만다. 입술에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그녀. 머릿속으로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쓸모없는 인간이라던 언니와 몸싸움했던 날, 부끄러워서 카노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이다 용기 냈던 날, 성폭행을 당했던 순간.


  이대로 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벌떡 일어나 보지만, 이미 경기는 끝났다. 그제야 이치코는 상대방 선수를 뜨겁게 끌어안으며 몇 번이고 고맙다며 인사한다. 그녀 인생에서 처음으로, 스스로가 만든 링 위에서 마지막 힘까지 다해 싸운 경험이 그토록 고마웠을 것이다. 이가 빠지고 눈두덩이 짓눌리도록, 얼굴이 망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싸워봤다. 경기가 끝나고, 그녀는 크게 눈물을 터트린다.


 눈물은 쉽게 나약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무언가를 간절히, 간절히 원해본 사람만이 서럽게 울 수 있다. 어떤 바람도 품어보지 못했던 이치코는 '이기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의욕을 가진 뜨거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규칙적인 운동이 만들어낸 에너지로 그녀는 엄마의 도시락 가게 일을 배우게 되고, 걸음걸이는 가벼워지고, 등은 곧게 펴졌다. 내게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인지, 누구에게 내 소중한 마음을 줘도 되고 안되는지 알게 됐다. 매일 아침 천변을 달리며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는 몸,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는 몸, 위험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강한 몸으로 그녀는 자신을 변화시켰다.



 경기가 끝난 뒤 이치코는 아버지와 맥주를 한 잔 한다. “나 이제 젊지 않아.” (그래도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했어)” 그리곤 씩 웃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말한다. “너 조금 변했구나.” 정말이다. 그녀는 변했다. 졌지만 웃을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 아닐까. 그런 게 스스로가 만들 수 있는 기적 아닐까. 웃을 줄 모르던 사람이 한여름 맥주처럼 청량하게 웃는 것. (사실, 나도 그렇게 웃고 싶어서 복싱장에 등록했었다.)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죠
싸울 수 있었기에 질 수도 있었죠
-  <백 엔의 사랑> OST 중에서



[글] 도상희


-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 김연수, <난주의 바다> 중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