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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상희 Aug 30. 2023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덤덤히 이별하다

영화 속 그녀에게 배운 결핍을 껴안는 법

  감은 눈꺼풀을 하염없이 보게 되는 사람이 있었다. 그곳에 나를 떠날 날이 쓰여있기라도 할 것 같아서. 언제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주름이 남은 미간, 숨결 따라 오르내리는 눈썹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떠났다. 른 여자에게.


온몸이 마를 만큼 울고 나자 '나를 위해 이래선 안된다'는 마음, '다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말갛게 떠올랐다. 다시 한번 살아서 다른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때, 이별 후에도 단정하던 그녀, '조제'가 힘이 됐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쓱쓱, 덤덤하게 나아가던 조제의 뒷모습을 닮고 싶었다.


 “맛있어? 당연하지, 내가 만들었는데.”   

  조제에게 허락된 세상은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뿐이다. 조제는 걷지 못한다. 그녀의 할머니에게 조제의 장애는 큰 허물, 숨겨야 할 부정한 것이다. 그렇기에 할머니는 조제가 해코지를 당할까 봐 거대한 유모차에 숨겨서 몰래 산책한다. 어느 날 유모차가 괴한의 습격을 받고, 근처를 지나던 츠네오가 조제를 구하며 둘은 처음 만난다. 조제 집에서 밥을 얻어먹게 된 츠네오. 맛있다고 칭찬하자 조제는 수줍게 고맙다고 하는 게 아니라 “당연하지, 내가 만들었는데”하고 답한다.


  이후 츠네오의 머릿속엔 가진 것 없이도 당당하던 조제의 눈매가 떠다닌다. 혹시라도 괴한이 또 나타나진 않을까 걱정된단 핑계로 조제를 찾는 츠네오. 하지만 다시 마주친 괴한에게 식칼을 휘둘러버리는 게 조제였다. 츠네오는 곧 그녀가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고, 그 당돌함 그리고 구름을 보면 “집에 가져가고 싶다”는 해맑음에 빠져든다. 하지만 어느 날, 사람들 눈에 잘 띄는 낮에 조제를 밖에 데려갔다가 할머니에게 쫓겨나고. 그는 조제를 잊고자 애쓰며 다른 여자친구를 사귀고, 대학 생활에 집중한다.



 “그럼 그쪽도 다리를 자르던지.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츠네오는 남겨진 조제 걱정에 달려간다. 둘은 곧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츠네오의 전 여자친구가 빼앗긴 츠네오를 찾겠다며 찾아오고, 그녀는 조제더러 “네 무기(장애)가 부럽다”며 비아냥거린다. 조제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다. 도리어 “그럼 그쪽도 다리를 자르던지” 쏘아붙일 뿐. 츠네오가 조제의 장애를 동정한 것이 아니라, 빛나는 조제 자체에게 끌렸을 뿐임을 조제는 잘 알고 있다.


  둘만의 나날을 보내던 둘은 어느 날 츠네오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차를 빌려 떠난 김에 조제가 가보고 싶어 하던 수족관에 도착한 둘. 하지만 폐장을 했다. 할머니와 살면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를 보고 싶었던 조제는 있는 힘껏 짜증을 낸다. 그런 조제를 힘겹게 업고 선 츠네오. 갑자기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본가엔 못 간다고 통보를 하고 동생은 “형, 지쳤어?” 묻는다. 그는 침묵으로 긍정한다.


  여느 연인들처럼, 가장 좋았던 부분이 단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책 밖의 세상을 신기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조제에게 반했고, 자신이 조제에게 다리가 되어 줄 수 있음이 기뻤던 건, 이미 과거의 츠네오다.



 “나 혼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별을 직감한 조제가 여행 중 어느 밤 조개 모양 침대 위에 누워 츠네오에게 말한다.

“네가 사라지면 나는 다시 혼자 깊은 바다 밑에서 빈 조개껍데기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그것도 나쁘지 않아.”

조제의 이 말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의 '포기'일까? '건강한 네가 장애를 가진 나와 영원할 리는 없으니까, 보내줄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로 읽힐지도 모른다. 그 말은 동시에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태도로 들리기도 한다. ''나는 이런 나고, 너는 이런 너고', '우리가 만나서 사랑을 했으니 그 사랑이 끝나면 나는 너를 보내주겠다'는 인정.


  나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조제가 바닥에 내려앉는 모습을 보면 알게 된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다리를 쓰지 못하는 조제가 부엌 의자에서 식사 준비를 마친 뒤, 다이빙을 하듯 땅에 털썩 내려앉던 순간. 자신을 믿고 온몸을 확 내려놓는 순간. 그것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잘 알아서 홀가분한 사람의 군더더기 없는 '털썩'이었다.  


   호랑이는 못 되지만 대신 지느러미로 헤엄을 치면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조제에겐 분명한 결핍이 있다. 장애가 있다는 것, 다르다는 것을 무시하고 그녀를 극복한 사람 취급하는 것도 기만일 것이다. 다만 조제는 이미 자신을 받아들이고 울음을 다 게워낸 사람이다. 그녀는 세상에 당연한 것(당연한 다리, 당연한 건강, 당연한 부모...)은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츠네오가 자신과 함께하는 순간이 당연하지 않았고, 미련 없이 사랑할 수 있었다.


   츠네오가 무너지듯 우는 장면 뒤로, 조제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나아간다. 그 산뜻한 뒷모습이 좋다. 아무것도 태울 것 없이 마음을 가져다 쓴 사람의 현현한 뒷모습. 그렇게 집으로 간 조제는 어느 부엌에서 오늘도 단정한 얼굴로 토란을 졸이고 있을 것만 같다. 다음 사랑을 준비하며, 나 자신을 위한 밥을 짓고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자신을 먹이고 토닥이며 힘을 낼 것이다. 빈 방에서 따스한 밥을 지어먹는 태도를, 나는 조제에게서 배웠다.


글 도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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