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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상희 Aug 16. 2023

<내 사랑> : 작은 방에서 커다란 세상을 그려내다

영화 속 그녀에게 배운 결핍을 껴안는 법

   “여기가 이렇게 별거 없었나?” 볕이 나뭇잎 사이로 들이치는 산책로였다. 그 애 손을 스치며 걸을 땐 영롱하고 찬란하던 길. 그 길을 걸으며 나는 물었었다. “너는 어떤 스타일로 옷 입는 걸 좋아해? 단발머리는 어때?”,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해?”, “나도 필름 카메라 알려줄래?” 먹는 것, 입는 것, 쉬는 방식.. 모든 것을 맞춰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을 얻을 줄 알았다.


  그 애가 떠나고, 나는 몇 계절을 흑백 사진 속에 살았다. 산들바람 초록 살랑임도, 라일락 보랏빛 향도 나 혼자서는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은 무엇인지, 뭘 할 때 가장 눈이 빛났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랑을 핑계로 자신을 버린 값이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도록 허락한 건,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앞가림도  한다고요? 그건 숙모 생각이고요]

  그 무렵  <내 사랑>에서 붓 한 필, 창문 밖 구름 하나만 있으면 혼자서도 온 세상을 충만하게 누리는 여자, ‘모드'(샐리 호킨스 분)를 만났다. 그녀는 선천적 관절염 탓에 기형아로 태어나 다리가 불편하고, 몸짓이 남과 다르다. 부모님이 사고로 떠난 뒤, 오빠는 그녀를 숙모네에 떠맡겼다. 숙모에게 모드는 밥만 축내는 천덕꾸러기, 길가의 아이들에겐 돌을 던지게 만드는 ‘기분 나쁜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돌을 그대로 맞지 않고 피하는 길을 택한다. 입고 싶은 대로 붉은 원피스를 차려입고, 절룩이는 자신만의 스텝으로 클럽에서 춤을 추는 사람이다. 누가 뭐라든 말든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숙모의 구박에도 꼬박꼬박 하고 싶은 말대답으로 받아친다. 그게 ‘모드’다. 숙모의 억압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고 싶던 어느 날, 식료품점에 ‘에버렛’이 낸 가정부 구인공고문이 나붙는다. 모드는 무작정 그의 집을 찾아 나선다.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혼자 사는 남자, 어부 에버렛은 “여자를 구한다고 했는데… 힘쓰는 일이나 할 수 있겠소?” 퉁명스레 말한다. “그럼 내가 뭐로 보이는데요? 저 일 잘해요.” 모드는 그의 무례함에 주눅 들지 않고 받아치지만 일단 자 기 필요 없다는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고 돌아간다. 며칠을 고민하던 에버렛은 “일단 일하는 거 보고 정합시다.”라며 모드를 데려오고, 그녀는 숙식 제공 외에도 임금을 당당히 요구하며 에버렛의 작은 오두막에 자리 잡는다.


 고된 뱃일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을 위해 씩씩하게 닭도 잡고 청소도 곧 잘하는 모드를 보며, 그는 그녀를 향한 의심을 거둔다. 모드는 손 가는 대로 구석구석 꽃과 새를 그려 넣기 시작하고, 칙칙하던 오두막 안엔 생활의 훈기가 피어난다. 그녀는 자신의 작은 오두막과 퉁명스럽지만 독립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에버렛에게 정을 붙여간다.


  관절염이란 장애가 있지만, 자신이 부족하다 굽히지 않고, ‘내가 감히’라는 생각 없이 욕망을 드러내는 그녀는 에버렛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부부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에버렛은 “차라리 나무토막이랑 하겠다”며 그녀에게 상처를 준다. 그럼에도 모드는 사랑을 애걸하거나, 아픈 다리를 보이며 동정심을 자극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당신이라도 좋아한다’고, 그리고 ‘당신은 이런 내가 필요하다’고 고백한다. 나만 이 오두막과 당신의 튼튼한 다리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당신에게도 내 아름다운 영혼이 필요하다는 그녀의 설득에 에버렛과 모드는 소박한 식을 올린다. “낡은 양말 한 쌍처럼” 부족하지만 다정한 생활을 이어나간다.


[내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어요]

  평소처럼 바닥을 쓸고 닦고, 아픈 다리로는 멀리 나갈 수 없어 창가에 앉아 튤립을 그리던 어느 날. 에버렛에게 주문한 생선이 배달 오지 않았다며 한 여자가 모드를 찾아온다. 그녀는 미술계 종사자로, 우연히 만난 모드의 화풍에 단박에 반한다. 모드는 그림 그리는 일이 좋았고, 누가 알아주든 아니든, 계속 그림을 그려왔다.


  비록 멀리 갈 수 없는 다리로 태어났어도, 그녀의 상상력은 하늘 위로도, 바다 아래로도 갈 수 있었으니까. 내 몸은 비록 어두운 오두막에 갇혀있을지라도, 내 삶은 그림으로서 더 아름다워질 수 있으니까. 작은 방 안에서도 큰 세계를 보고, 그것을 그려낸 모드의 그림은 자유롭고 독특했다. 그것을 알아본 방문객은 그림엽서를 주문하고, 모드의 그림은 점차 입소문을 타며 널리 알려진다.


  그런 모드의 웃음을 TV방송으로 본 숙모는 말한다. “끝내 행복을 찾은 건... 우리 집안에서 너뿐이구나.”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았던 사람, 자신을 낮추지 않고 당당하게 원했던 사람, 삶이 주는 고통에 주저앉는 대신, 그림으로 아름다움을 포착하길 기꺼이 원한 사람. 그게 모드였다. 

  혼자서도 붓 한 필만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사람, 인간이 오롯한 혼자일 수는 없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에버렛과 함께한 사람, 그럼에도 외로움에 자신을 잃거나 매달리진 않았던 사람. 모드 루이스. 그녀를 만나고 나온 극장 밖엔 색으로 만개한 봄이 와 있었다. 노랗게, 환하게.



[글] 도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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