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원 Aug 16. 2023

<다가오는 것들> : 상실을 '자유'라 부르다

영화 속 그녀에게 배운 결핍을 껴안는 법

  ‘사랑으로 타인을 구원한다’는 서사에 열광했다. 열아홉 무렵부터  <이터널 선샤인>처럼 기억을 지워도 영혼에 각인될 사람과 눈 위에 누워보았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처럼 바닷속 조가비에 함께 누워 별을 바라봤다. 물론 상상 속에서. 현실에선 혼자 누워서 영화만 봤다. 다른 이들이 우연을 사로잡아 운명으로 곁에 앉히는 동안 나는 스쳐가는 수많은 우연 곁에 머뭇거리기만 했다.


  아직 완벽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고, 언젠가는 영화 속 그들처럼 사랑으로 구원받으리라 믿었다. 한없이 기다렸다. 그러다 밥벌이하는 어른이 됐고. 힘겹게 눈 떠 출근 버스에 몸을 찌부려트려 넣고 저녁까지 회사에서 먹는 날이 쌓였다. 주말엔 잠을 몰아 잤다. 로맨스 영화는 ‘영화’ 일뿐이란 시니컬한 어른이 되어갔다. ‘타인의 사랑만이 정말 구원일까? 그렇담 로맨스 없는 내 삶은 뭐지?’



 그때 영화  <다가오는 것들>(감독 미아 한센-러브)을 만났다. 영화 속 나이 지긋한 철학 선생님 ‘나탈리’에겐 이제 가슴 뛰는 뜨거운 연애도, 함께 철학을 논하던 남편도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의 삶에 여전히 남은 것들을 담담히 보여준다. 자신에게 배움을 구하는 학생들, 읽어갈 책더미, 혼자 보아도 좋을 영화, 깊은 대화를 나눌 친구 그리고 새로 태어난 가족까지. 나탈리는 남편과 이별하며 ‘사랑’이란 언덕을 뒤 로하고도, 새로이 나타나는 생의 언덕을 끊임없이 오르는 여자다. 로맨스 만이 구원이 아님을, 커다란 상실감 속에서도 유유히 헤엄칠 수 있음을 나탈리는 가르쳐 준다.


 [중년의 허물 벗기, 이름 벗기]

  나탈리는 철학 교과 ‘선생님’이자 철학서 ‘작가’이고 남편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다. 그리고 새벽마다 불안하다며 그녀를 불러내는 노모의 하나뿐인 ‘딸’이다. 그 이름들을 짊어지고 중년에 접어들었다. 영화는 세 월의 풍화 속에서 나탈리의 이름표가 하나씩 허물어지는 과정을, 나탈리란 인물이 어떤 태도로 이 상실을 해석해 내는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25년을 함께한 남편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이혼을 통보한다. 자살소 동을 벌이거나 곡기를 끊으며 관심을 갈구하던 엄마는 생을 마감한다. 출판사는 요즘은 철학서가 팔리지 않는다며 개편 중단을 통보하고, 자식들은 집을 나가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그녀는 허무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주저앉지 않는다.


 남편이 외도를 고백했을 때, 그녀는 베개를 집어던지며 화내거나, 바 짓가랑이에 매달리며 울지 않는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쪽에서 “나는 내 청춘, 내 인생을 당신에게 바쳤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 있나.”며 오열하는 일은 흔하다. 그러나 나탈리는 남편과 동등한 철학 연구자 관 계로서 토론하는 생활을 꾸려왔다. 서로의 관계에서 내가 희생한 게 있다면 그것 또한 자신의 결심이자 책임이었으며, 이제 관계의 형태가 달 라질 때가 되었을 뿐이라고 받아들인다.


  성장한 자녀와 제자들이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때가 와도 서운해하지 않는다. 노쇠한 어머니를 돌볼 때도 “스스로 하시라”라고 자 주 말한다. 한 존재의 무게를 완전히 떠맡는 것, 그래서 ‘구원자’가 되었을 때 느끼는 그 희생의 달콤함을 아시는지. 나탈리는 그것에 취하지 않는 여자다. 타인의 가슴에 패인 구멍을 내가 감히 메울 수 있다고 자만하지 않는 여자다. 그것이 나탈리가 보여주는 독립심이며, 상실의 파도 속에 자신을 지켜낸 부표다.


 [나는 잃은  아니라, 자유를 되찾은 거야]

  상실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그녀는 반짝이는 ‘나탈리’란 이름표 단 하나를 주워든다. 그 폐허에 문득 옛 제자 파비앙이란 인물이 찾아오지만, 영화는 ‘젊은 제자와의 사랑의 도피’란 손쉬운 서사로 그녀를 도망치게 두지 않는다. 나탈리는 로맨스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상 실을 꾸준히 견뎌 나간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나탈리는 공부를 위해 파비앙이 친구들과 꾸리고 있는 시골의 작은 코뮌(공동체)으로 향한다. 코뮌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난생처음 듣는 포크송에 반응하며 그녀는 말한다.

 

“내 남편과 나는 20년간 브람스와 슈만만 지겹게 들었어. 이런 생각을 해.
애들은 품을 떠나고, 남편은 가고, 엄마는 죽고... 나는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


  그녀는 상실을 ‘상실’이라 부르지 않고 ‘자유’라 부른다. 모두 가고 난 텅 빈자리에 누워 그곳을 자신의 무덤 삼는 일은 쉽다. 한편, 같은 빈자리를 두고도 나탈리와 같이 가벼워진 몸으로 떠날 수도 있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잃은 김에, 날아가 보는 것. 그녀는 그렇게 다시 채우려 애쓰지 않는, 빈 몸으로 거듭난다. 새로운 연인으로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려 하지 않고, 출판사의 기대에 부응하는 새 책-내 안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것-을 쓰지 않으며, 코뮌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다가오는 것들’을 조용히 맞는다. 딸이 낳은 아이를 보며 기뻐하고, 여전히 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친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에 가슴 설레하며 삶의 활기를 찾아낸다.


  그녀에게 뜨거운 사랑은 다신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탈리는 알고 있다. 생의 오솔길에는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나는 나탈리를 보며 끝없이 펼쳐냈던 기다림을 반듯하게 접기로 한다. 아직 오지 않은 한 사람을 망부석처럼 기다리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간다. 책과 산책,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 그리고 좋은 영화 한 편 속으로.



[글] 도상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