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3 때까지 엄마와 잤다. 불안도 높은 성정 탓인지, 응석받이 막내딸로 태어난 자라난 때문인지, 어둠이 검은 바닷속처럼 무서워 혼자서는 잘 수 없었다. 엄마 손을 꼭 쥐고 아이처럼 잤다. 혼자 떨어져 나와 대학에 가야만 했을 때, 나는 갑자기 가슴에 맨홀 뚜껑만 한 구멍이 뚫린 사람처럼 허망해졌다. 이젠 집에 가도 아무도 날 맞아주지 않네? 적막한 방에서 나 혼자 밥을 먹어야 하네? 독립의 달콤함은 찰나, 자유가 두렵고 외로웠다. 부모님껜 잘 지내고 있는 척을 했지만 실은 우울해서 방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태가 됐다. 낯선 땅에서 새 가족을 만들어야만 했다. 같이 밥도 먹고 온전히 마음을 나눌 사람들이 간절했다.
다행히 좋은 선배들을 동아리에서 만났다. 한강변에 사는 선배 언니네에서 학술포럼 준비를 위해 며칠 산 적이 있다.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낮이면 열심히 공부했고 밤이면 열심히 취했다. 그날도 달큼한 술 냄새를 바람에 날려 보내며 언덕길을 왁자지껄 올라갔다. 선배집에 도착해서는 꼭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속 네 자매들처럼 두근거리며 과실주 뚜껑을 열었다. 지난해 다 같이 담갔던 딸기주였다. 홀짝이다 훌쩍이다, 달구어진 얼굴을 식히려 낡은 옛날식 복도로 나가면, 저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였다. 우리는 기대어 울다가 웃다가 서로의 고민을 토하고 이내 아무렇게나 엉켜 잤다. 돌아보면 그때 내겐 그들이 가족이었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
홀로 상경한 내가 외로움에 생기를 빼앗기지 않고 씩씩할 수 있었던 건, 새로운 '가족' 덕분이었다. 피 섞이지 않은 이들이 나를 살렸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타인이었던 막내 '스즈'가 한 가족으로 스며드는 이야기다. 아름다운 바다 마을에는 첫째 사치, 둘째 요시노, 셋째 치카만 산다.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세 번째 부인과 산다던 아버지는 연락 한 번 없다 부고로 돌아온다. 장례식장에선 남겨진 열다섯 살 '스즈'가 이미 다 커버린 눈동자로 자매들에게 첫인사를 건넨다.
스즈는 반듯하다. 제 나이로 살지 못하는 아이의 꼿꼿함이 묻어 있다. 그게 첫째 사치의 눈에 밟힌다. 장례식 자리, 스즈의 새엄마가 고작 열다섯인 스즈에게 조문 인사말을 떠넘기려 한다. 이때 첫째 언니가 나서며 말한다. “아니요. 어른들이 할 일입니다.' 첫째는 스즈에게서 모든 것을 혼자 책임지려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까. 응석 부리는 게 어색해져 버린 스즈가 측은했을까. 세 언니들은 돌아가는 길에 스즈에게 “같이 살래?” 묻고, 스즈는 그 손을 용기 내어 붙잡는다. 어머니가 다른 막내와 '세 자매'가 '네 자매'로 다시 태어난다. 할머니는 첫째를 나무란다. '사람은 개나 고양이가 아니야. 너희 가정을 깨트린 여자의 딸이잖니.' 그녀는 대꾸 않는다. 스즈에게는 죄가 없으니.
스즈는 새로 맞은 가족 속에서 점차 자신 안의 아이다움을 찾는다. 축구부에 들어 신나게 공을 차고, 밥을 먹다 '맛있다! 더 주세요!' 말하고, 함께 담근 매실주가 달다며 마시고는 꼬인 혀로 엄마 아빠 미워! 속마음을 뱉어본다. 웃음을 되찾아간다. 세명이나 되는 언니들이 '야 그 블라우스 내 거잖아~' 밥상머리 다툼을 하고,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다정히 말해주니까, 사는 것 같다. 그 시끌시끌함이 스즈의 볼에 생기를 가득 불어넣는다. 그럼에도 스즈는 철 모르는 아이는 되지 못한다. 언니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나는 한 가정을 깨트린 여자의 자식'이란 죄책감을 안고 지낸다. 자신에겐 아버지의 전처이자, 세 언니의 엄마인 사람을 맞닥뜨리고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여기가 네 집이야. 언제까지나>
그런 스즈를 세 언니는 '연대'의 마음으로 더욱 껴안아 준다. 연대는 온갖 고통을 겪어낸 사람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사람은 덜 겪도록 모든 것을 최대한 알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너는 나보다 덜 힘들었으면 해. 그러니 내가 겪은 모든 걸 알려줄게.' 하는 마음가짐이 연대라는 것이다. 이들은 가부장제(가장이 가족성원에 대해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지배, 통솔하는 가족 형태)의 리더십과는 다른, 연대의 방식으로 서로를 키워내 왔다.
스즈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자는 선택이나, 오래 사귀던 남자와 헤어져야 할 순간, 간호사 혹은 은행원이라는 직업인으로서의 고민 등..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 속에서 자매들은 혼자서 문제를 삭이거나 첫째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열어놓고 이야기 나눈다. 그 과정에서 삐치거나 다투기도 하면서 마음을 열어놓아 보이며 서로를 키워간다. 그런 '연대의 마음'으로 언니들은 넷째 스즈를 들였고, 스즈가 스스로 클 수 있게 지켜봐 준다.
첫째는 “여기가 네 집이야. 언제까지나.” 믿음을 줬다. 간섭하기보다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 마을에서 어떤 스즈로서 살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도왔다.
둘째는 출근길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어봐. 그러면 매일 아침 눈 뜨고 싶어 져.” 알려주고 발에 매니큐어를 발라주면서 “이건 남자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한 거야, 꾸미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말한다. 스즈에게 사랑의 기쁨과 스스로를 가꾸는 일에 대해 알려준다.
셋째 사치는 스즈가 처음으로 마음 편히, 아버지와의 추억을 말해보는 사람으로, 사치는 아빠가 좋아했던 멸치덮밥을 먹으면서 “돌아가신 아빠에 대해 (죄책감 없이) 말하고 싶을 때 언제나 말해도 돼.” 알려준다.
이런 세 자매들 속에서 스즈는 분명 눈부시게 자랄 것이다. 누군가는 엄마도 아빠도 없이 자랐다 모르는 소리를 하겠지만, 이들은 '가족'이다. 기꺼이 내 소중한 것을 내어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 나보다 덜 아팠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는 사람들. '피'가 아니라 그런 '마음'으로 뭉친 사람들을 이 영화는 '가족'이라고 부른다. 스즈는 가족 속에서 어른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 정성껏 무언가를 알려줄 수 있는 어른, 밥을 지어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랄 것이다. 대학시절 외롭던 내가 언니들과 함께 밥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하고, 딸기주를 마시며 배웠던 것처럼. 타향에서 언니들을 가족으로 느끼고, 그들로부터 내 시간을 들여 타인에게 따스한 밥을 해주는 마음을 물려받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