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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상희 Aug 29. 2023

<와일드> : 모래바람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다

영화 속 그녀에게 배운 결핍을 껴안는 법

  찬 바람이 불어오면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던 그 겨울이 생각난다. 갑자기 닥쳐온 한기에 누군가의 품이 그리웠다. 연애를 시작하고 이어갈 자신은 없고, 넘쳐흐르는 외로움도 주체 못 하던 때였다. 데이팅 앱을 켜서 손가락 몇 번을 튕기니 자판기 음료수 뽑듯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나는 음료수를 뽑았다. 잠깐의 온기를 나누고 홀로 남겨진 방 안은 지독하게 추웠다. 나는 공허함과 죄책감을 등 뒤에 붙이고 밤길을 오래 걸었다. 맞닿았던 살의 감촉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면서, 유령과 정을 나눈 사람처럼. 길 잃은 사람처럼.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 그녀에게서 헤매던 나를 보았다. 그녀가 스스로 붙인 성 ‘스트레이드’에는 ‘길 잃은’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누구보다도 소중한 친구였던 엄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셰릴은 텅 빈 마음을 마약과 섹스로 채우다 결국 이혼을 맞는다.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이를 가진다. 완전히 길을 잃었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우연히 PCT(Pacific Crest Trail) 트레킹 책자를 보게 된다. 4,285km의 기나긴 사막과 눈길. 완전히 혼자가 될 수 있는 길. 그녀는 책 표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길 위에서 다시 태어나다]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던 딸로 돌아갈 거야.” 셰릴은 자신의 키보다 큰 짐을 지고 트레킹에 나선다. 멕시코 국경부터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 서부를 종단해 ‘신들의 다리’에 이르는 94일간의 여정이다. 그녀는 혀를 태우는 사막과 살을 에는 칼바람이 공존하는 길을 맨몸으로 걷는다. 그 험지에는 독을 품은 방울뱀이, 겁탈하려는 남자가, 발톱을 깨부수는 돌들이 숨어있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셰릴은 엄마를 떠올린다. “너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하고 그걸 지키렴.” 말하던 엄마. 가난과 폭력 속에서도 '이왕 살아야 한다면 기쁘게 살고 싶다'던 엄마의 콧노래가 셰릴의 머리맡을 지킨다.


   트레킹을 하던 중 이혼한 남편은 전화를 걸어와 “내가 미안해. 그 일(이혼) 때문에 먼 길을 걷고…” 하며 사과를 전한다. 그러나 셰릴은 한 남자 때문에 트레킹을 결심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이제 오롯한 '나'로 살아보고 싶다. 사랑을 갈구했던 자신, 허울만 남은 결혼생활을 유지해 보려던 허깨비 같은 자신,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마약으로 채우려던 자신... 그 모든 과거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려 오른 길이다. “나 자신으로 살아보질 못했어. 엄마 아니면 아내로만 평생을 살았어. 시간이 많은 줄 알았지….”라던 돌아가신 엄마의 고백을 되새기면서.


 [모래바람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길]

동료: 외로워요?


셰릴: 음,, 솔직히 '내 진짜 삶'에서 더 외로운 거 같아요.

친구들이 그립긴 하지만 집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당신은 어때요, 왜 왔어요?


동료: 내 안의 뭔가를 찾아야겠다 싶어서요. 제대로 온 것 같아요.

보세요. 보기만 해도 재충전되는 풍경이에요.


셰릴: 저희 엄마가 지겹게 하던 이야기가 있어요.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으니까. 네가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어.

너도 아름다움의 길에 들어설 수 있어.


   긴 여정의 끝에 다다를 즈음, 셰릴은 동료를 만나 들판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엄마가 남긴 말처럼, 내가 애써서 담아두지 않아 흘러가버릴 뿐,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다. 아무리 우울하고 슬프고, 죽어버리고 싶은 하루라고 해도 하루에 꼭 일출과 일몰만큼, 두 번의 아름다움이 배송된다. 하지만 걷기 전의 셰릴은 그 아름다움을 몰랐다. 혼자 노을을 보고, 아름답다고 혼잣말하는 일은 처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의 죽음이란 상실, 이혼이란 상실 이후로 아름다움을 찾는 일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 길을 걸으며 셰릴 안에 감춰져 있던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힘', 감응의 눈동자가 다시 떠졌다. 지나온 내면의 암흑과 대비되는, 대비되기에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본다. 흰 설경에 점처럼 찍힌 여우의 눈빛, 새벽잠을 깨우던 개구리 소리, 푸른 숲과 그곳에서 스쳐 지나갔던 아이가 불러주던 노래, 끝없던 지평선에 떠오르는 태양…. 그 속에서 셰릴은 엄마를 만났고,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났고,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다시금 믿게 되었다. 삶을 다시 살아나갈 힘을 차곡차곡 쌓게 되었다. 트레킹을 마치고, 셰릴은 다시 살아간다.


   누군가는 셰릴을 더럽혀진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고작 트레킹 한 번으로 마약을 했던 몸이, 아무 남자와 잤던 몸이, 다시 태어났느냐 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셰릴을 다시 태어난 여자라고 부르고 싶다. 자신 안에 여전히 아름다움이 남아있음을 아는 여자로. *먼지 쌓인 푸른 종이는 여전히 푸른 종이임을 아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글 도상희




*인용 : 먼지 쌓인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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