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서 생긴 일 1
고작 3일간의 태국 여행을 위해 현찰 90만 원을 뽑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현찰 90만 원은 정말 기막힌 우연의 연속으로 내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지난 베트남 여행에서 현금 환전을 해가지 않아 꽤나 고생을 했던 나는 수수료가 좀 더 나가더라도 공항에서 현금 인출을 할 생각이었다. 공항 밖에 절대 현금 없이 나가지 않겠노라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3일간의 여행비로 20만 원이면 충분할 듯 보였다. 식비, 교통비, 관광비 외에 더 결제해야 할 것은 숙소비. 미리 예약해 둔 호스텔에 예약금을 제외한 4만 원 정도만 더 내면 되는 상황이었다. 물가도 저렴한 태국에서 이것저것을 고려해 봐도 하루에 오만 원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럼 거기서 대략 절반정도인 10만 원을 환전하면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태국 환율을 검색했다. 태국 돈 약 2,000 THB 정도가 한화로 9만 원이 조금 안되었다.
짐 찾고 바로 ATM으로 달려가서 2,000 THB 인출해야지. 속으로 다짐했다.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쓸 카드는 한국카드였다.
원래 나는 한국 카드를 잘 쓰지 않는다. 나는 근 몇 년간 호주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대부분의 돈을 벌어왔기 때문에 딱히 한국 카드를 쓸 필요가 없었다. 비상금으로 한국 입출금 계좌에는 50만 원 정도만 넣어두고 영어 과외비 등이 입금되면 카드 개설을 해두지 않은 다른 계좌에 넣어둔다. 혹시나 하는 스캠에 대비하기 위해 호주든 한국이든 50만 원 이상의 돈은 입출금 통장에 잘 넣어두지 않는다.
평소 같았으면 호주에서 쓰던 카드를 썼겠지만 아뿔싸, 카드의 만기일이 지나있었다. ATM기에 사용할 수 있는 현물 카드는 한국 카드뿐. 뭐 그냥 한국 카드로 돈을 인출하면 되겠지 생각했다.
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 과외 학생 한 명이 혹시 과외비를 ‘미리’ 보내도 되냐고 연락을 해왔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던 터라 의아했지만 나쁠 건 없으니 그러셔도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통장에 35만 원이 더 들어오며 잔액은 총 86만 원이 되었다. 원래 같으면 바로 다른 통장으로 돈을 옮겼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항에서 하는 것보단 숙소에 가서 하는 게 안전할 것 같아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렇게 태국에 도착을 했다. 짐을 찾자마자 나는 바로 ATM 앞으로 갔다.
인출 버튼을 누르기 전, 한 번 더 환율을 확인했다. 출국 전 계산한 대로, 인출할 금액은 2,000 THB였다. 나는 2,000 THB라고 쓰인 버튼을 눌렀다. 아니, 눌렀다고 생각했다.
ATM의 현금을 세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고 이내 현금 출입구가 열렸다.
'응? 이게 뭐지?'
출금구가 열리자마자 든 생각은 이거였다. 그곳에는 현금 다발이 들어있었다. 한화로도 그런 현금 뭉치는 본 적이 없었다. 원래 태국 돈은 이런가? 생각을 하던 찰나, 핸드폰에서 돈이 출금되었다는 알람이 떴다.
출금
865,380원
잔액: 2,082원
'응? 이게 뭐지?'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출금구에 들어있던 현금 다발을 꺼내 들었다. 주황색 지폐 다발 앞부분을 보니 1,000라고 적혀있었다.
그렇다. 내가 왜 숫자를 잘못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원래 출금하려고 했던 금액의 10배인 약 90만 원 상당의 태국 돈을 출금해 버린 것이다.
원래라면 애초에 50만 원 이상의 돈이 통장에 잘 없기 때문에 인출 자체가 안되었을 것이다. 하필 그날, 태국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과외비를 미리 받게 되는 바람에 잔고가 딱 그만큼, 딱 인출이 될 만큼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현금 뭉치를 받아 들고 정신이 새하야진 나는 일단 그 뭉치를 들고 근처에 지나가는 아무 직원을 붙잡았다. 혹시나 다시 통장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당연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공항에 있던 돈과 관련되어 보이는 모든 곳에 이 현금뭉치를 처리할만한 방법이 혹시 있냐고 물었지만 다들 이런 일은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공항을 나섰다. 태국 돈 90만 원어치와 함께였다.
태국의 평균 월급은 한국의 1/5 수준. 그러니까 나는 한국으로 치면 대략 450만 원 정도의 가치를 하는 태국 돈을 들고 공항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나는 공항에서 그 현금을 인출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냥 손에 그 현금을 들고 이리저리 다니며 직원들에게 물어보았었다. 혹시 나쁜 마음을 먹은 누군가가 보지 않았을까? 범죄의 타깃이 되지 않을까?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아찔해졌다.
이 돈은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하필 숙소도 타인과 한 방을 공유하는 호스텔이었기 때문에 혹시나 도둑맞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돈을 가지고 다니는 건 더 두려웠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소매치기가 꽤 일어난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그냥 그 돈을 가지고 다니는 것 자체가 안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나는 그냥 숙소에 두고 다니기로 했다. 인당 하나씩 주어진 사물함에 자물쇠를 채운 뒤, 큰 배낭의 가장 안쪽 주머니에 돌돌 말아 넣었다. 다행히 그 돈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한 푼도 도난당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돈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 썼을 까?
당연히 다 쓰진 않았다. 원래의 계획대로 약 20만 원 정도만 썼을 뿐이다.
남은 돈은 여러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혹시나 하며 올린 '곧 태국 여행 가는 사람?'이라는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3주 뒤 방콕 여행을 간다며 답장을 한 친구에게 20만 원, 호주에서 알게 된 당시에 태국에서 지내던 태국 친구에게 남은 45만 원가량의 돈을 주고 그 금액에 해당하는 만큼 돈을 호주 달러로 송금받았다.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다행히 큰 사건 사고가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어째서 동남아에서는 현찰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이렇게 많이 생기는지 어이가 없다.
이렇게 또 한심한 교훈 하나를 얻으며 본격적인 태국 방콕 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