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편이다. 말이 없는 사람 앞에선 가끔 다변이 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듣는게 말하는 것보다 편하다. 말 없이 듣고 있으면 상대의 속이 잘 들여다 보인다. 가끔 장단 맞춰주고 우스개나 던지는 대화가 (얻는건 없을지 몰라도) 나는 즐겁다. 정색을 하고 토론을 하거나 무언가 주장을 펼치고 나면 뒤가 개운치 않다. 대화한 후에 되씹는 버릇 때문에 무슨 말을 뱉었는지 복기하는 과정이 괴롭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설명하고 자신의 아는 것을 펼쳐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중엔 남자들이 많았다. 문제를 해결하려하고 합리적인 처방을 해주려고 하는 것도 동성 친구들이었다. 여성과의 대화중엔 잘 느끼지 못하는 특성이다. 여성들은 주로 말(주장)이 없었고 있어도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로 다른 견해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대부분 남성 사이의 대화였다. 잡다한 지식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대화 역시 열이면 아홉은 남자가 주도했다.
대화의 주도권이 개인간 권력의 차이와 위계를 반영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 대화 자체에 흥미를 잃어 버리곤 했다. 그런 대화는 일하면서 하는 것만으로도 넘친다.
나 역시 가끔은 다변이 된다. 주로 후배들과 함께 할 때다. 의식을 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이런 저런 조언과 알은체를 하게 된다. 대화를 끝내고 나면 부끄러울때가 많다. 선배는 입을 다물고 지갑을 열어야 한다던데 지갑이 열리면 덩달아 입도 지옥문 열리듯 열리는 게 문제다. 아직 부족하다는 얘기다.
대화는 강의가 아니다. 강의 역시 대화의 일종이라 토론이나 질문 답변 없는 일방적인 강의는 큰 울림을 주지 못한다. 강의도 그럴진대 술 한잔 놓고 오가는 대화가 한 사람의 강연장처럼 되는 건 견딜 수 없는 노릇이다. 심드렁한 사람들 앞에서 끊임 없이 자신의 지식자랑을 하는 친구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두어번 찌르는 건 온전히 그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자신의 허벅지를 내어놓고 말했으면 좋겠다. 누군가 내 허벅지를 찔러줄 사람이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게 서로 기분 상하지 않고 평화롭게 대화하는 방법이라면 그깟 허벅지 쯤이야 뭐가 중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