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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Jan 12. 2024

모성애 대신 책임감으로

엄마가 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도 나는 내가 모성애가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남들은 아이가 웃는 모습만 봐도 피로가 사르르 녹는다는데 나는 여전히 힘들기만 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즐거이 하는 다른 부모들이 부러웠다.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아이에게 성의없이 대꾸하거나 혹은 짜증을 내고 나면 엄청난 죄책감이 몰려왔다. 아이를 낳아놓고 무조건적인 사랑만 줘도 모자를 판에 상처를 주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괴로웠다. 엄마로서 실격인 것만 같았다.

단순히 엄마로서의 짐을 내려놓고 내 몸이 편해지는 길만을 선택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는 엄마로서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책임감으로 메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감정으로서의 '모성애'와 이성으로서의 '책임감' 모두를 갖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천성적으로 감성이 부족한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아직 어린 아기에게 그걸 기다려달라고만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휴직을 내서 아이 옆에 있어줬다. 휴직 기간 중에는 내내 아이와 한몸처럼 붙어 있으면서 물리적인 시간을 제공했다. 복직을 하고 나서는 나만의 시간을 다소 포기하고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은 대부분 아이와 함께하기로 했다. 육아서를 찾아보고 아이 월령에 맞는 정서적, 발달적 자극을 주려고 노력했다. 지치고 피곤하고 때론 휴식이 간절했지만 천성적인 모성애가 부족한 내가 할 수 있는 이성적인 노력을 최대한으로 하려고 했다.

혹자는 '애정이 부족한 엄마가 아무리 노력하는 척을 해도 아이들은 다 알고 결핍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내 노력은 결국 부질없는 것인가 싶어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다행히도 크게 힘들어하지 않고 밝고 건강한 아이로 잘 자라고 있다. 말을 잘 하게 되고 나서는 가끔씩 아이의 속마음이 궁금해서 "엄마가 널 사랑하는 것 같아?"라고 물어보면 아이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응"이라고 대답한다. 왜냐고 물으면 "내가 엄마를 좋아하니까!"라고 한다. 아이는 실제로도 물리적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 어린이집 선생님이나 심지어 아빠보다도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많이 좋아한다고 늘 말한다. 감정적인 사랑을 아낌없이 퍼부어주는, 언제나 화 내지 않고 짜증 내지 않고 힘이 넘치는 슈퍼우먼같은 엄마는 못 되었지만 그런 엄마여도 아이는 충분히 사랑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야 알았다. 책임감 역시 모성애의 한 줄기라는 것을. 나는 이제까지 피 끓어 넘치는 애정과,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 초인적인 능력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만을 모성애라고 생각했다. 육아가 힘들 뿐 무한한 행복에 빠져 허우적댄 적이 없는 나는 엄마로서 부족한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그 마음을 아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이의 행복을 위해 내 행복을 조금 미루고, 내가 쉬고 싶은 마음을 잠시 참고 아이와 놀아주는 것을 선택하고, 목이 아파도 아이가 가져오는 책을 열심히 읽어주고, 내가 보고 싶은 영화 대신 아이가 보고싶은 만화영화를 함께 보는 내 작은 노력 또한 모성애의 다른 모습이었음을 알게 됐다.

모성애는 많은 사람들이 묘사하듯 아이를 낳는 순간 저절로 '뿅'하고 생기는 게 아닌, 그냥 쉬고 싶은 본능을 잠시 억누르고 아이와 놀아주는 것을 선택하는 그런 사소한 '이성적인 선택' 하루하루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세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가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 중 하나도, 모성애에 대한 지나친 신격화와 강요 분위기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나 자신을 위해서만 오롯이 살아왔던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해야 한다는 점에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특히 엄마라면, 여자라면 응당 자기 새끼를 위해 자연스럽게 희생해야만 하고, 열심히 쌓아온 커리어고 뭐고 다 내려놓아야만 마땅히 엄마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렇지 않으면 '실격'이라는 가치관이 현 세대 가임여성들의 반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실제로 육아를 해 보니 그런 측면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아이와 나의 행복이 배치되는 부분도 있고, 그런 상황에서 나의 행복을 잠시 미루거나 혹은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도 있다. 요즘은 희생하는 부모, 특히 희생하는 어머니상에 대한 반감으로 희생을 되도록 하지 않는 육아가 오히려 좋고 '쿨한' 것으로 취급되는 분위기도 다소 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아이는 저절로 잘 자라기 어려우므로, 부모의 어깨에서 덜어진 의무는 고스란히 양가 할머니나 보육교사 등에게 얹어지는 부작용도 있다. 혹은 '자아'에만 몰두한 일부 부모들이 아직 어린 아이 돌보기를 소홀히 한 탓에 아이들이 정서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출산율도 낮다는데 유독 소아정신과는 흔해진 이유에는 이런 배경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성애 강요에 대한 반발로 '아이보다 나(부모)를 우선시하자'고 주장하는 데는 다소 반감이 있다.


다만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모성애에 대해서는 다른 각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모성애는 엄마가, 여자가 본능적으로 하는 희생정신만이 아닌 어른이 나보다 약한 아이에게 갖는 '책임감'일 수 있다. 특히 내 의지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아이에게 마땅히 좀 더 힘이 세고 많은 능력을 가진 어른인 부모가 약한 아이를 지켜줘야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책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임감은 엄마만이 갖는 게 아닌 아빠일 수도 있고, 다른 가족구성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어른들이 미성숙한 아이들을 위해 일정 책임감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공공장소에서 민폐를 끼치는 아이를 훈육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내 새끼를 위해 다들 불편을 참고 편의를 봐 달라는 뜻이 아니다. 어른이기에 다음 세대를 위해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내가 내 아이를 위해 다소간의 불편을 감내하고, 힘들 때가 있더라도 견디는 순간이 엄마의 눈물겨운 희생이 아닌 어른으로서 행하는 책임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다. 자기검열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됐다. 아이 역시  부모가 마땅히 어른으로서, 부모로서 지는 책임감에 대해 보고 들으며 자신의 인생과 사회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진짜 어른으로 자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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