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임신 확인 후 만 6년만에 처음으로 큰 결심을 했다. 항상 비어 있던 내 손톱에 네일아트를 받으러 간 것이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나는 네일샵에 가지 않으면 하다못해 네일 스티커나, 네일컬러라도 바르고 다녔다. 아무것도 없는 생 손톱은 왠지 밋밋해 보이기도 했고, 매번 날씨와 코디에 맞춰서 손톱을 장식하는 것이 꽤 재미있었다. 평소 외모를 많이 신경쓰지 않는 편이지만 네일컬러만큼은 이상하게 신경을 쓰게 됐다. 사실 남의 손톱 따위를 누가 그리 열심히 볼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무심하게 지나칠 것이다. 내 손톱은 내가 제일 열심히 본다. 그럼에도 나는 나만 신경쓰는 곳을 예쁘게 꾸미는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마치 식탁 옆에 꽂아둔 꽃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보고 있으면 왠지 조금은 행복해지는 그런 장치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받은 네일아트는 바로 결혼식 전날 받은 본식 아트였다. 무려 명동까지 가서 수십만원을 내고 3D 입체 장미꽃을 만들어 붙였다. 꼭 하고싶었던 모양의 아트였기 때문이었다. 정신없는 결혼식날 누구 하나 내 손톱을 알아챈 사람은 아마 나 말고는 아무도 없으리라. 아마도 남편도 기억을 못 할 것이다. 그래도 나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소비였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왠지 무엇도 바를 수 없었다. 임신 중에는 혹시나 손톱에 뭔가를 바르면 뱃속의 아기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까봐서, 아이를 키우면서는 역시 연약한 아기 피부에 상처라도 나거나 화학 물질이 묻을까봐 생 손톱을 바짝 깎은 상태로 살았다. 아이가 좀 더 크고 나서도 일과 육아를 정신없이 병행하느라 네일 샵에서 1~2시간을 멍하니 보낸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항상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척 맘에 드는 디자인의 네일컬러를 한 동료의 손톱을 보면서, 아, 나도 이제는 좀 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
마침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네일샵이 있었다. 큰마음 먹고 시간을 내어 그곳을 찾았다. '이달의 아트' 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디자인을 고르고 손톱 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마법을 즐겁게 구경했다. 네일샵을 찾지 않던 몇 년 사이 기계는 더욱 성능이 좋아진 것 같고 자석을 이용해 장식을 더욱 멋지게 연출하는 기법도 있었다. 6년만에 네일아트를 받는다니 샵 사장님이 말했다. "네일 받고 어디 놀러 가시나봐요"
"아뇨, 딱히 어디 가는건 아니고 그냥 받고 싶어져서요."
"아 그러시구나. 이렇게 예쁘게 받으시면 어디 놀러가야 하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어디 놀러갈 일이 없다.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한 달 뒤에 가족여행 일정이 있지만 그때쯤 되면 이미 아트도 다 사라져있을지도 모른다. 가족과 직장 동료를 제외하면 딱히 만날 사람도 한정적이다. 사실 누굴 만난다고 해도 내 손톱을 그리 열심히 볼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이런 날엔 어딘가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데.'
오랜만에 들은 이런 말에 문득 나의 20대가 떠올랐다.
20대의 나는 금요일과 주말만 되면 마음이 다급해졌다. 얼마 없는 연락처 속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려 의무적으로 약속을 잡고 번화가에서 만났다. 매번 그 친구가 그 친구라서 특별하게 재미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비슷비슷한 맛집과 카페를 가고, 서로 신세한탄을 하고, 주변 얘기도 좀 하다가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그럼에도 왠지 사람들이 찬란한 청춘이라고들 말하는 20대 나이에 주말을 집구석에서 보내는 건 왠지 직무유기처럼 느껴졌다. 억지로 소개팅에 나갔고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마셨다. 몇 잔 마시지도 못하고 모두 게워냈다. 살을 빼려고 무리하게 굶다가 거식증에 걸리기도 했다. 요요가 와서 더 쪄버렸지만.
당시의 나는 나답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다운 것은 곧 도태되는거라고 믿었다. 10대 시절 무척 내성적이고 사회성이 떨어진 탓에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늘 겉돌았다. 기센 애들에게 수시로 치였다. 상처투성이인 나의 10대를 애도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대신 나는 애써 그때의 나와 멀어지기를 선택했다. 억지로 MBTI의 'E'를 연기했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인간관계도 끊어내지 않고 애써 양적 인맥 늘리기에 집착했다. 10대 시절 나의 은신처가 되었던 도서관과 서점을 멀리했다. 왠지 그런 곳에 자주 가면 옛날처럼 찐따가 돼버릴 것만 같았다. 술집과 번화가와 트렌디한 곳을 다녀야만 할 것 같았다. 자주 어지럽고 부대끼고 몸이 떨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 결과 나는 그럭저럭 겉보기엔 평범한 사회인이 됐다. 인싸도 아싸도 아닌 애매한 '그럴싸'가 되었다. 편해진 점도 있지만 자꾸만 나다운 것과 멀어지는 선택이 쌓이다 보니 어느새 내 몸과 마음엔 독이 쌓이기 시작했다. 마흔을 일년 앞두고 몸과 마음에서 각종 이상증상이 툭툭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고름이 터져나오듯, 더 이상 이렇게만 연기하듯 삶을 살아선 안된다는 목소리처럼, 내 몸과 마음이 나를 막아섰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그럴싸해 보이는 모습을 위해 연기하는 것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타고난 사람들을 이기지 못했고, 즐기지 못하는 일은 성과도 그저 그랬다. 급기야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혼란스러워졌다. 이제 딸린 가족까지 있으니 더욱 나 자신을 죽이고 없애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철저히 복무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 싶었다. 그 정점에는 육아가 있었다. 나를 온전히 소멸시키고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삶을 살려 하다 보니 도저히 이렇게 평생을 견디며 살 자신은 없었다.
명상을 하고 여러 책을 읽었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에는 '나답게 살아라'라는 결론이 있었다. 그랬다. 돌고 돌고 돌아서 결국 나. 나를 괴롭게 했던 나다움에서 벗어나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결국은 진짜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 나는 결국 그러한 결론을 얻기 위해 참으로 어렵고 길고 고통스러웠던 과정을 거쳤는지도 모르겠다. 그 과정이 모두 헛되지는 않으리라. 아무것도 모르던 십대 시절부터 골방에 틀어박혀 나다움에만 천착했다면 오히려 세상과 유리된 나에만 집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의 모든 과정은 다 나에게 가장 최선의 것을 펼쳐내기 위한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나는 돌고 돌고 돌아서 마흔이 6개월 남은 시점에 다시 나다워지기를 선택했다. 6년만에 받은 마음에 쏙 드는 예쁜 손톱을 하고, 화려하고 번화한 곳에 놀러가지 않고, 무리하게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않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과 조용함이 있는 도서관과 서점에 틀어박혀서 좋아하는 책들을 읽는다.
내가 나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아낄 때,
내가 가장 편안한 곳에, 내가 가장 나답다고 느끼는 곳에 길이 있으리라.
...나는 그것이 진실로 삶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자신의 진실대로 사는 것, 본디 제 모습인 사랑이 되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아니타 무르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