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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것을 경험하고 나를 배우다

by 뚜벅초

이 글은 앞선 글과 어느 정도 연관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전 글을 꼭 읽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https://brunch.co.kr/@ruthypak/295


초등학교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수업중에 선생님이 분단별로 OX게임 같은 걸 했다. 문제를 내고 O,X를 맞추는 게 아니라 그냥 무작위로 O와 X 중 뭔가를 머리 위로 만들어보고 한 사람이라도 다른 걸 표시하면 지는 게임이었다.


1분단이었던 내 자리에서 아이들은 전부다 약속이나 한 듯 머리 위로 O를 그렸다. 나는 뭘 해야하나 잠깐 고민하다 아무 생각 없이 X를 했다. 나는 졸지에 X맨이 되어 그 게임을 지게 만든 원흉(?)이 되고 말았다. 같은 분단 아이들은 "아니 너 왜 X 했어~ 당연히 O 해야지~"라고 나를 책망(?)했다. 나는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맹세코 어느 쪽을 골라야 한다는 논의 같은 건 따로 없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그냥 무작위로 아무 선택지나 골라야 할 때 X가 아닌 O를 고르는 것이 '국룰'이었다니? 싶어서 어린 마음에 꽤나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학창시절이 거의 생각나지 않는 내게 남은 몇 안 되는 어린 시절 기억이니까.


대학에 들어가서까지 나는 심심치 않게 특이하다, 이상하다, 4차원이다 같은 얘기들을 들었다. 나는 나의 범상치 않은 특이함으로 내가 친구를 못 사귀고, 연애를 못 하고, 성격이 우울하고, 가난하고, 인생이 안 풀린다고 믿었다. 내가 생긴대로 산다면 나는 이대로 평생 친구도 없고 연인도 없고 제대로 된 돈벌이도 못한 채 가난하고 비참한 인생을 맞이할 것만 같았다. 나는, O의 세상에서 나 홀로 X이니까. 모두가 긍정을 말하는 세상에서 혼자 삐딱선을 타는 '재수 없는 존재' 일테니까.


사본 -ChatGPT Image 2025년 7월 1일 오후 03_31_50.png 이미지: 챗GPT


그래서 나는 마치 빵틀에 반죽을 끼워맞추듯 나를 일정한 틀로 깎아서 새로 만들려고 고군분투했다. 최대한 평범해 보이는 말과 행동과 착장을 연습했다. 남들은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거라지만 나는 일종의 연기를 하면서 이를 습득해야 했다. 대학 3학년쯤이 되자 '어딘가 예뻐졌다'는 주변의 평판과 함께 나의 삶도 조금씩 편안하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럭저럭 쉬워졌고 성격이 좋고 무던하다는 소리도 제법 들었다.


나이를 더 먹고도 남들 눈에 특이하게 보일 만한 선택은 최대한 멀리했다. 남들처럼 정규직으로 취업해 일정한 월급을 받고, 튀지 않는 무난한 옷을 입고, 별로 관심 없는 친구들의 쇼핑에 따라나서고, 치부가 될 만하거나 남의 입에 오르내릴만한 것들은 입밖에 내지 않고, 사람들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무해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기 좋은 신도시 아파트를 사서 이웃들과 무난하게 어울리는 척을 했다. 회사에서는 충성스러운 직원이자 가정에서는 성실한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연기는 연기일 뿐이었다. 나는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듯한 애매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날 때부터 별 생각 없이 머리위로 O를 그리던 아이들은 보통의 노력으로도 사회의 무난한 구성원으로 자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사는 것 같았다. 반대로 X를 그렸지만, 어린 날의 나처럼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냥 꿋꿋이 X를 그리는 어른이 된 사람들도 자신의 색깔대로 만족스러운 성취를 누리는 것 같았다. 평범한 직장인으로만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 와중에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O도 X도 아닌 △가 되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깊은 우울이 찾아왔다. CT를 찍어도 아무 소견이 안 나오는 격한 심장 통증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괴롭혔다. 이러다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은 두려움에 공황장애로 번졌다.


과거의 내 선택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왕 O로 태어나지 못했을 바에야 그냥 뚝심있게 X로 살아갈걸. 왜 나는 이래저래 눈치만 보다가 이렇게 한없이 '나 아닌'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주변을 돌아보면 즐거움은 없고 온통 의무, 의무, 의무뿐이었다. 직장에서의 의무, 가정에서의 의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의무... O 코스프레를 하는 과정에서 나이를 먹다 보니 이것저것 생기게 된 '지켜야 할 것'들이 늘어나면서 내 의무 또한 무거워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영성가들은 '인생을 너무 의무감에 짓눌려 심각하게 살지 말라'고들 했다. 그러나 나는 강제로 페달을 미친듯이 밟아나가야만 하는 삶인 것 같았다.


그러나 또한 인생에서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고들 한다. 내게 일어난 모든 것들은 다 일어날 만한 이유가 있기에 일어난 것이다.

나의 지난한 방황의 날들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우리는 모두 무한한 사랑이기에, 인간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인생이라는 체험을 한다고 한다.

무한한 사랑밖에 없는 곳에서는 딱히 배울 것도 없기에 결핍 투성이인 인생을 거치면서 궁극적으로 사랑을 배운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껏 내가 알아온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내 삶을 이루었음을 알았다. 내 경험이란 저 커다랗고 복잡다단한 색과 모양으로 된 무한한 태피스트리에 수놓아진 한 가닥 실과도 같았다. 갖가지 다른 색깔의 실들은 내가 맺고 있던 관계들, 나와 연이 닿은 온갖 삶들이었다. (중략) 각각의 모든 만남이 얽혀서 그때까지의 내 인생이라는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 속의 한 가닥 실에 지나지 않았지만, 또한 완성된 전체 그림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아니타 무르자니




그렇기에 나 역시 그렇게 맹렬히도 '나 아닌'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게 아닌가 싶다.

내가 아닌 것들을 체험해야, 역으로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자아 의식이 없다. 엄마와 나를 구분하지 못한다. 돌쯤 되어 스스로 걸어다니기 시작해야 비로소 엄마와 내가 구분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인지발달로서의 '나'의 구분이 돌쯤에 이뤄진다면, 진정한 자아 의식으로서의 '나'의 발견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하지 못하는 듯하다. 대부분 별 생각 없이 사회에서 좋다는 가치를 추구하고 그때 그때의 즐거움을 좇다가 생을 마감한다. 나 역시 내내 그렇게 지내다가 이런저런 어려움과 갈증을 겪고 아주 최근에서야 명상을 통해 '내 안의 나'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 나답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겪어내면 진짜 나다운 것들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게 된다.

나답지 않은 일을 하고 나답지 않은 관계를 맺고 나답지 않은 곳에 가서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하며 살다 보니 비로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들을 찾게 됐다. 남들이 좋다니까 따라한 것들에서 50-60%정도의 만족도를 느끼며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인가보다' 하다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하면서 100%의 만족감을 느끼면 비로소 그 전에 했던 것이 진짜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맹목적으로 좇아다녔던 그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아니 오히려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아주 값진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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