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평화로운 숲속 유치원.
...인데 새로운 아이가 전학을 왔다.
버미보다 조금 작은 아기곰 한 마리가 엄마곰 손을 잡고 나타났다.
아기곰은 조금 긴장한 듯, 유치원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교실에는 버미와 미미, 제이, 준이, 로니를 비롯한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기곰을 바라보고 있고
앞이 보이지 않는 두두는 킁킁거리며 새로운 냄새를 감지한 듯했다.
부엉 선생님은 날개를 펄럭이며 엄마곰과 아기곰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새로운 친구가 왔군요. 우리 마을에 이사 왔나요?"
엄마곰이 말한다. "네, 원래 소나무시에 살다가 얼마 전 숲속마을에 왔어요."
"오오~ 그렇군요. 환영해요. 새로운 친구 이름은 뭐니?"
"...마일로." 아기곰이 작은 목소리로 엄마곰 뒤에 살짝 숨으며 말한다.
엄마곰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마일로. 여긴 다 너처럼 어린 동물들 뿐이란다."
그때 버미가 물었다. "마일로는 몇 살이야?"
마일로는 대답 대신 한 쪽 앞발을 쭉 내밀었다가 조심조심 한 개를 접는다. 발가락 네 개. 네 살이라는 뜻이다.
"와! 우리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네." 미미가 말했다.
"맞아. 마일로는 네 살이야. 여긴 형아, 누나들이 많구나." 엄마곰이 웃었다.
"마일로! 우리랑 같이 그림 그리자."
"아니야! 잡기놀이 하자."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의 등장에 이미 신났다.
턴테이블이 돌아가고, 조용한 재즈 음악이 집 안을 유영하듯 채운다.
창문에 투둑투둑 부딪히는 빗물 소리와 함께 음악 소리가 녹아들고 있다.
곰철 씨는 콧노래로 음악을 따라부르며, 주방에서 버섯 스프를 끓이고 있다.
"메리도 이 스프를 참 좋아했는데..."
나이가 드니 제법 혼잣말이 많아진 곰철 씨다. 아니, 어쩌면 메리가 떠난 이후부터인지도.
스프가 거의 다 끓어갈 무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음, 소피아, 마일로. 왔니?"
"할아버지!"
곰철의 딸, 소피아가 조금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마일로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
마일로는 할아버지를 부르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오, 마일로. 유치원에서 첫 날은 어땠니?"
"...조금 부끄러웠어요. 그런데 형아 누나들이 잘 놀아줘서 좋았어요."
"그래, 다행이구나. 이 동네 아이들이 참 착하더라. 언제 한 번 꼬마 녀석들도 모두 초대해서 케익이라도 구워 줘야겠구나. 아, 소피아, 저녁 먹으렴."
저녁식사 후 마일로가 잠자리에 들고,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곰철의 맞은편에 소피아가 앉는다.
"소피아, 안색이 안 좋네. 무슨 일 있니?"
"...아, 아빠." 소피아가 약한 한숨을 쉬며 말한다.
"내일 마일로 아빠 만나는 날이잖아. 면접교섭 허용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그 곰 얼굴, 정말 안 보고 싶어."
곰철은 잠시 찻잔을 내려놓고 말한다.
"그래, 소피아. 네 마음은 안다. 쉽지 않지."
곰철은 딸의 한 쪽 앞발을 잡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마일로에겐 그래도 아빠가 필요하잖니. 그가 좋은 곰인지 나쁜 곰인지 별개로, 마일로는 자기 아빠를 볼 권리가 있으니까."
소피아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알지, 아는데...그냥 그 곰 보는 게 너무 싫어. 예전 생각하면 속이 뒤집혀."
"그래, 네 마음이 아픈 게...그렇게 쉽게 사라지진 않는 게 당연해. 그래도 마일로를 위해서라면, 네 아픔을 잠시 뒤로 하는 것도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니."
소피아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아빠, 나 아빠가 반대할 때 그냥 아빠 말 들을 걸 그랬어요. 내가 마일로 아빠 데려왔을 때, 아빠가 유독 떨떠름해하셨잖아. 그땐 아빠가 괜히 딸 시집 보내기 아까워서 그런다고 생각했는데...아빠가 보는 눈이 있었던 것 같아."
곰철이 소피아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한다. "에이, 아니다. 세상 일은 원래 겪어봐야 아는 게 있다. 그걸 겪기 전에는 누가 아무리 뭐라 해도 들리지 않아. 그냥, 네 인생에서 네가 겪어야 할 일들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렴. 게다가 네 성격에, 내가 고집 부린다고 내가 네 말을 들었겠니?"
"푸훗, 그건 맞아. 내가 아빠 말을 그렇게 잘 들을 딸이 아니지."
"그래, 얼른 자거라. 내일 아침에 마일로 데리고 나가려면."
아침이 밝았다.
아침 안개가 역 플랫폼에서 스르르 떠다니고 있다. 인적 드문 조용한 숲속마을 역 플랫폼엔 아침 이슬의 차가운 물 냄새만이 퍼지고 있었다.
마일로는 조그만 손으로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역사 안을 걸었다. 아직은 잠이 덜 깬 듯한 표정이다.
뎅-뎅-
역 시계가 종을 치며 아침 8시를 알렸다.
그 순간 들어온 열차에서 낯익은 얼굴이 내린다.
마일로의 아빠-제이슨은, 다소 굳은 얼굴의 덩치가 큰 회색곰이다. 작업복 차림의 그가 걸을 때마다 역이 조금씩 울리는 듯하다.
"...소피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왔네." 소피아가 어색하게 대답한다.
"아빠!" 마일로는 두 팔을 쫙 벌리고 제이슨에게 안긴다.
"오~ 마일로, 어이쿠, 많이 컸네!" 제이슨은 마일로를 번쩍 들어올린 뒤 한 팔로 안는다.
"아빠! 나 숲속마을에서 유치원 다녀! 나처럼 곰 형아도 있어!"
제이슨은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마일로의 머리털을 마구 헝클인다.
소피아는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는 애써 웃고 있지만, 텅 빈 눈으로 그저 바라보고 있다.
"고마워, 시간 내줘서. 마일로랑 잘 놀다 올게."
"알아, 늦지 않게 와."
마일로는 제이슨의 품에 안겨서 소피아에게 앞발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엄마 안녕! 이따 봐!"
소피아는 힘없이 앞발을 흔든다.
이윽고 부자는 자욱한 아침 안개 속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소피아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마음으로 안개 속을 응시하다 천천히 돌아섰다.
소피아가 간 곳은 바로 심슨 박사의 병원 옆 작은 가게.
이 곳은 앞으로 소피아가 운영할 약국 공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멧돼지 스미스 씨와 그의 조수 비노는 아침부터 구슬땀을 흘리며 약국의 카운터와 약 수납장의 마지막 정리 작업을 하고 있다.
"고생이 많으세요. 이거 좀 드시면서 쉬세요."
소피아는 아빠가 구운 블루베리 케익과 커피 두 잔을 내밀었다.
"아이구, 이렇게 맛있는 간식을 주시니 안 쉴 수가 없군. 비노, 잠깐 내려와서 쉬자고."
"네, 스미스 씨!"
"그나저나 마을에 약국이 생긴다니, 마을 주민들이 참 좋아하겠어요." 비노가 입 안 가득 케익을 넣고 우물거리며 말한다.
"맞아, 우리 마을에 꼭 필요하던 거였지. 심슨 박사님이 진료를 잘 보시긴 했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필요한 약을 살 수 있음 좋겠다 싶었지." 스미스 씨도 맞장구를 친다.
"도시에서 약초학을 배워둔 게 이렇게 쓸모가 있네요. 도움이 되신다면 좋겠어요." 소피아가 말했다.
짧은 디저트 타임이 끝나고, 소피아는 공사판 안에서 바쁘게 약품 정리를 하며
문득 지난날을 떠올렸다.
어머니 메리의 장례를 치른 후, 곰철의 쓸쓸한 뒷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소피아는 결국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숲속마을에 오기로 결심했다.
숲속마을의 주민들은, 소피아의 사적인 이별보다- 그들 가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관심을 가져 주고,
각자가 줄 수 있는 것을 조금씩 나누어 줬다.
아들과 함께 강하게 살아 온 소피아였지만 이따금씩 무너지는 날이 있었던 소피아는
숲속마을에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아빠가 끓여 주는 따끈한 버섯 수프도 지친 그녀에게 힘을 줬다.
어느새 숲속마을 골목골목이 어두워졌다.
약국 공사가 얼추 마무리되고,
한결 깔끔해진 수납장 안엔 약통들이 깨끗하게 열을 맞춰 배열돼 있다.
약국 앞 길에 눈부신 빛이 들어왔다.
곧이어 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길게 쏘며 약국 앞에 멈춘다.
뒷문이 열리며 마일로가 빨간 하트 모양 풍선을 손에 든 채 튀어나오고, 천천히 앞자리에서 제이슨이 내린다.
"엄마!" 마일로가 소피아에게 안긴다.
"잘 지냈어?" 소피아가 제이슨을 쳐다보며 묻는다.
"응, 마일로가 놀이공원 가고 싶다고 해서 같이 다녀 왔어."
소피아는 대꾸하지 않는다.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흐르다...
제이슨이 어렵게 입을 뗀다.
"소피아, 어차피 마일로도 알고 있어서... 나, 다음 달에 결혼해. 북쪽 마을 곰이야. 오래 전부터 알던 친구야."
소피아의 마음 속에서 뭔가가 쿵 떨어진다. 그러나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그래. 축하해."
"고마워."
"아빠! 다음에도 또 놀이공원 가자!"
제이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마일로의 머리를 헝클인다. "그래, 다음에 또 가자. 엄마 말씀 잘 듣고."
제이슨이 탄 차는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졸음으로 조금 칭얼거리는 마일로를 품에 안으며-소피아의 머릿속엔 복잡한 생각들이 떠다니고 있다.
제이슨이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
혹시 마일로와 멀어지게 되는 건 아닐까?
마일로는 아빠를 기다리는데, 보러 오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지?
새 아내 북쪽 곰이 마일로를 만나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
소피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한다.
괜찮아, 그가 어떻게 지내든- 마일로는 내가 충분히 사랑을 줄 거야.
소피아의 품에 안겨서 어느새 잠든 마일로의 체온이 유난히 더 따뜻하다.
숲속 카페 2층에 있는 곰철, 그리고 소피아와 마일로의 집.
벽난로에선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장작이 불타고 있고, 식탁엔 따끈한 버섯 스프와 잘 구워진 빵이 놓여 있다.
소피아가 말한다.
"아빠, 있잖아... 제이슨이, 다음달에 결혼한대요."
곰철이 잠시 숟가락질을 멈춘다. "그렇구나."
곰철이 스프 몇 숟가락을 먹다가 다시 말을 한다. "소피아, 너도 이제... 다른 곰을 만나서 새 출발 하는 거 어떻니."
소피아는 잠시 숟가락을 꼭 쥐었다가, 아빠를 보며 말한다.
"아니에요, 아빠. 전...지금은 마일로만 보며 살고 싶어요. 약국 일에도 집중하고요."
벽난로의 장작이 파직 소리를 내며 불꽃을 튀겼다.
"그래, 우리 딸이 뭘 하든...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다."
달그락 달그락, 수프 볼에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와 장작 타오르는 소리,
그리고 창밖엔 부엉이 울음 소리가 울려퍼지며 봄밤이 깊어짐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