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철이 되면 여우 제이네 부모님의 손길은 더욱 바빠진다.
제이의 부모님은, 숲속마을에서 가장 큰 농장-그래봐야 다른 지역의 기업형 농장에 비하면 텃밭 수준이지만-을 운영하고 있다. 제이의 농장Jay's Farm. 이 곳에서 여우 부부는 할머니 여우와 함께 달콤한 호박과 고소한 옥수수, 당근이며 무, 딸기, 블루베리 등을 키우고 있다.
"지난번에 태풍에 울타리가 쓰러지고 나서, 스미스 씨가 더 튼튼한 걸로 세워 주셨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올해는 특히 더 농사가 잘 될 것 같은 느낌이에요."
농장 곳곳에 피어난 하얀 꽃들 위로 꿀벌이 잉잉 소리를 내며 날아다닌다.
제이 엄마는 밀짚모자 안으로 배어난 땀을 닦았다.
허리가 아픈 듯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등을 쭉 폈지만, 표정만은 가뿐한 모습이다.
부부는 원래 소나무시의 높고 큰 빌딩에서 하루종일 일했다. 다른 동물들이 맡긴 돈을 보관하고, 투자하고, 불리는 일들을 했다. 그 일은 적지 않은 돈을 벌게 했지만 또 그만큼의 스트레스를 줬다. 제이 엄마의 털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제이 아빠는 고객들을 관리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다. 가끔씩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은 '푹 쉬어야 낫는다'고 했다. 하지만 여우 부부는 쉴 틈이 없었다.
무엇보다 갓 세 살짜리 제이는 아침 해가 뜨기 전 쿨쿨 자는 채로 엄마아빠 등에 업혀 동물보육원에 가서, 해가 다 진 뒤 다시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다. 제이도 자주 아팠고 엄마아빠를 찾으며 울기도 했다.
제이의 엄마는 종종 고향 숲속마을을 그리워했다.
숲속마을에 살던 어린 시절에는 학교가 끝나면 종일 친구들과 오솔길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걷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때로는 기차를 타고 해변에서 파도에 발을 담가 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불편했고 부족한 것도 많았지만 마음은 평화로웠다.
여우 부부는 휴가를 내고, 오랜만에 어린 제이의 손을 잡고 숲속마을의 여우 할머니 집에 갔다.
할머니 여우는 농장에서 딴 옥수수 몇 개를 쪄서 딸 내외와 손주에게 내밀었다.
"돈 번다고 고생이 많다, 너네가."
"나, 아무래도 여기로 돌아올까봐...도시 생활 너무 힘드네. 제이도, 제이 아빠도 힘들어하고. 다 그만두고 농장이라도 하면서 살고 싶어."
그러나 할머니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아니, 너네 그 안정된 회사를 그만두고 여기로 온다고? 농사가 장난인 줄 아니? 곡괭이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애가..."
아빠여우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장모님, 걱정하시는 건 이해합니다..하지만 저희가 많이 지쳤어요."
"맞아, 엄마...이제 더 이상은 이렇게 살기 힘들어."
할머니 여우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했다.
그날 밤, 물을 마시러 잠시 부엌에 간 할머니 여우는 딸네 가족이 있는 방 앞을 지나갔다.
그곳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제이의 목소리였다.
"엄마, 내일은 다시 집에 가는 거야? 나 가기 싫어."
"안 돼, 엄마 아빠는 출근해야지. 너도 동물보육원 가고."
"싫어. 엄마아빠랑 떨어지기 싫어. 엄마 회사 가지 마아"
제이는 엄마여우 품에 안겨서 울다가 잠이 들었다. 제이가 잠들자, 이번엔 엄마여우가 흐느꼈다. 그 옆에서 아빠여우가 조용히 아내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할머니 여우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다음 날 아침, 할머니여우는 여우 부부에게 갓 끓인 따뜻한 옥수수 수염차를 내밀며 말했다.
"내가 어제는 좀 심했던 것 같구나. 너희가 오죽 힘들었으면 그런 결심을 했을지...
그래, 기왕 여기 오려면 내가 도와주마."
엄마여우의 눈에서 눈물이 도르륵 떨어졌다. 아빠여우는 소리 없이 활짝 웃었고, 제이는 "이제 그럼 할머니랑 같이 사는 거야? 신난다!"라며 만세를 불렀다.
그때부터 프로 농사꾼 할머니여우의 특훈이 시작됐다.
"호박 덩굴은 이렇게 엮어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참. 이래가지고 언제 배우겠니."
"당근은 딱 이맘때 캐야 맛이 좋아. 자, 손목을 사용해서 이렇게... 저기 여우 서방, 그쪽 방향이 아니라니까."
처음 잡아보는 농기구가 서툴러 생채기도 많이 났지만, 여우 부부의 마음은 어느새 희망으로 가득 찼다.
숲속 유치원에서 돌아온 제이가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킥보드를 타고 농장으로 돌아왔다.
아빠 여우가 나무에 못질을 해서 만든, Jay's Farm이라고 쓰인 푯말을 농장 입구에 설치하고 있었다.
"우와, 이게 뭐야 아빠?"
"응, 우리 제이 이름을 딴 농장 이름이지! 이제부터 여긴 제이의 농장이야."
"이야, 우리 집 완전 농장 집이네!"
제이네 가족이 숲속마을에 온 첫 달.
그 동안 제이 부모님은 도시에서 타인과 소통보단 경쟁을, 일상을 즐기기보단 생존을 하는 데 익숙했다.
그래서- 숲속마을 주민들의 다른 의도 없는 친절,
조건 없는 베품에 다소 놀랐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던 여름날,
아빠여우는 호박밭의 덩굴을 고정하려다 바람에 밀려 비에 흠뻑 젖고 말았다.
그때, 맞은편 밭의 사슴 아저씨가 바로 달려왔다.
"이 쪽 말뚝 몇 개 쓸래요? 여기 더 튼튼한 게 있어요!"
그리고는 말없이 말뚝 몇 개를 대신 박아주고, 수건을 가져와 아빠여우의 털을 닦아 줬다.
"아...정말 감사합니다."
순간, 아빠여우는 사슴 아저씨가 바로 옆 농장이라고 자신을 당연히 견제할 줄 알았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며칠 뒤에는 숲속마을 광장에서 작은 파티가 열렸다.
새로 숲속마을 주민이 된 제이네 가족들을 환영하는 자리였다.
마을사무소장 미세스 펜네는 허브차를,
코끼리 부들이 아저씨는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찹쌀떡을,
미미의 엄마는 따끈하게 구운 블루베리 파이를 가져 왔다.
미미 엄마가 제이네 부모님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은 이런 거 자주 해요, 같이 먹어요!"
옆에서 미미도 제이에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구운 거야. 같이 먹자!"
제이네 가족은 가슴이 따듯해짐을 느꼈다.
우리는 진짜로 환영받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파티를 마치고 엄마와 아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며 제이가 말했다.
"엄마 아빠, 있잖아, 여기는 다들 가족 같아!"
"그래, 아빠도 그렇게 생각했어."
아빠여우는 밤 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시에선 볼 수 없었던-쏟아지는 은하수가 그들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었다.
오솔길 옆으로는 풀벌레만이 찌르르르 울고 있고, 부엉이 소리가 숲에 울려퍼졌다.
"참 좋다."
엄마여우가 웃으며 말한다.
"그래, 우리가 찾았던 게 바로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
여우 부부가 숲속마을에서 농장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서툴기만 하던 농사일도 조금은 손에 익기 시작했고- 제이 할머니의 잔소리를 듣는 일도 조금씩 줄고 있다.
"힘들지?" 할머니 여우가 새참거리를 가지고 오며 묻는다.
"응, 힘들어. 그래도, 사무실에서 종일 야근할 때의 힘듦과는 다른 느낌이야. 둘 다 힘들긴 하지만, 여기는 더 기분 좋은 힘듦인 것 같아." 엄마여우가 말한다.
할머니 여우는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