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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틴 로맨스는 쉽지 않아

by 뚜벅초

숲속중고등학교 중학부 3학년, 목이 길고 날렵한 기린 소년 이안은 오늘도 하늘이 어둑해질 때까지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다.

그의 털은 온통 땀으로 젖어서 뭉쳐 있다. 제법 더워진 저녁 날씨에 바람조차 드물다.


"헉....헉....헉."

이안이답지 않게 오늘따라 그의 머릿속에는 복잡한 생각이 가득하다.


"네가 이안이니? 다음 달 입단 테스트 잊지 말고 꼭 와라."

지난 주말, 아빠인 기린 경찰관과 함께 다녀온 도시 축구팀 경기장에서 우연히 만난 도시 축구팀의 코치는 이안이를 단번에 알아봤다.

숲속 학교 출신답지 않은 이안의 탁월한 축구 실력이 어느새 도시 축구에도 소문이 자자한 모양이다.

이안이는 쑥스럽게 뒷머리를 긁었지만 코치의 말은 사뭇 진지했다.



이안이도, 사실은 큰 무대에서 달리고 싶다.

숲속중고등학교 운동장보다 훨씬 큰 축구장에서 실력 있는 동료들과 공을 차고 싶다.

하지만 도시 축구팀 입단을 선택한다는 건,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한다는 건-바로 정든 숲속마을의 친구들, 그리고 익숙한 초록의 숲과 나무와는 한동안 멀어진다는 뜻이다.


꿈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정든 숲속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이안이는 눈 앞의 축구공에 집중하며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공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 때만큼은 그에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로지 눈 앞의 축구공을 좇을 뿐이다.

그런 단순한 매력에 이안이는 어릴 적부터 축구공만을 따라다녔다. 방과 후에도, 주말에도, 늘 운동장을 누비며 때로는 마을 아이들의 선생 노릇까지 했다.

이안이답지 않은 상태를 알아챈 것은 숲속중고등학교의 체육 선생님, 호랑이 태거. 숲속초등학교 체육 선생님 '티거'의 쌍둥이 형이다.


"이안,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집에 안 가고 뭐 하고 있니."

"아...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안이 공을 발로 세우고 꾸벅 인사를 한다.

"너, 무슨 고민 있지?"

"....."

"잠깐 시원한 거라도 마시면서 얘기 좀 할까?"

머뭇거리는 이안에게 태거가 손짓한다.


둘은 운동장 한켠 벤치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다.

"너, 도시 축구팀 입단 테스트 제의 받았지?"

이안이 움찔한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네."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보기에도, 너는 숲속마을에만 있기엔 아까운 녀석이니까."

태거가 이안의 등을 가볍게 두들긴다.



그 시간, 숲속마을 병원의 침대에서 엘리가 눈을 뜬다.

찹쌀떡 가게 부들이 아저씨의 딸, 코끼리 소녀 엘리는 학교 체육수업 중 갑자기 쓰러져서 선생님의 등에 업혀 이곳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 옆엔 토끼 간호사 메이(미미의 이모)가 걱정스런 눈으로 엘리를 바라보고 있다.

"엘리, 일어났구나. 좀 괜찮니?"

"으...여긴 어디..에요..?"

"병원이야. 너 갑자기 쓰러져서 입원했었어. 잠시만."

메이는 잠시 병실을 나가 의사 선생님인 심슨 박사님을 불러 온다. 흰머리수리답게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인 심슨 박사는, 조류 최초로 의대 수석 졸업을 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때 마침 병원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두 마리의 코끼리들이 들어온다. 부들이 아저씨와 그의 아내 코끼리 아줌마다.

"엘리야!! 이게 무슨 일이니 정말."

"그러게, 다이어트 좀 적당히 하라니까."

부들이 아저씨는 방금 전까지 가게에서 찹쌀떡을 만들다 왔는지 얼굴과 앞발에 하얀 가루가 묻어 있다.

"어..엄마..아빠..."


심슨 박사가 몸을 돌려 코끼리 부부에게 말한다. "역시, 다이어트를 했나 보군요. 피검사를 했더니 빈혈이 심하게 나왔어요. 당분간 영양 섭취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눈이 조금 벌게진 코끼리 아줌마가 말한다. "아니 글쎄, 얘가 그 좋아하던 찹쌀떡도 딱 끊고 매일같이 운동만 하면서 살을 빼야 한다고...."

엘리는 고개를 푹 숙인다. "죄송해요, 엄마 아빠..."


코끼리답게 통통한 소녀 엘리는 언제부턴가 같은 반 친구 이안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날렵한 뒷다리로 축구공을 차며 다른 친구들을 압도하는 모습에

언제부턴가 엘리의 눈은 항상 이안이를 좇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이의 늘씬하고 가는 목과 다리에 대한 동경은

결국 자신의 굵고 큼직한 다리와 몸통에 대한 실망감으로 이어졌다.

타고난 코끼리 체질 탓에 다이어트의 효과는 더뎠고, 식단을 더욱 줄이면서 엘리는 자주 어지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엘리는 체육시간에, 쿵! 소리를 내며 운동장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사본 -ChatGPT Image 2025년 10월 10일 오전 11_22_16.png 사진: 챗GPT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가고 간호사 메이와 심슨 박사가 병실을 나간 사이, 엘리는 앞다리에 링거줄을 꽂고 누워 있다.

'내가 쓰러지는 걸...걔도 봤겠지? 아, 너무 쪽팔려. 이제 어떻게 학교 가...'

엘리의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계속 고민에 빠져 있기에 병실은 적당한 냉방과 깨끗한 이불로 너무 쾌적했다. 어느새 엘리는 깊은 잠에 빠졌다.


침대자락으로 창밖의 노을이 붉게 물들 때야 엘리는 눈을 떴다.

그리고 침대 옆 협탁에 못 보던 꽃다발 하나를 봤다.

빨갛고 노란, 제라늄 꽃이었다.

꽃 위에는 작은 카드가 놓여 있었다.

'얼른 나아서 학교에서 만나자.'

카드를 본 엘리의 귀가 살짝 빨개졌다.



엘리가 다시 학교에 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나서였다.

친구들은 엘리의 자리에 몰려와 걱정해 줬고, 엘리는 대답 대신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친구들을 안심시켰다.

모두가 물러나고 나자, 엘리의 옆에 긴 그림자가 하나 섰다.

이안이다.

"엘리...괜찮아? 갑자기 쓰러져서 걱정했어."

"어..아... 괜찮아..."

"다행이다."

"...그리고, 꽃 고마워..." 엘리가 수줍게 미소지으며 시선을 아래로 하고 말한다.

하지만 이안이는 좀 당황한 기색. "응? 무슨 꽃?"

"어...? 병실에 꽃..."

"...모르겠어. 병문안 가 보고 싶었는데, 요즘 입단 테스트 때문에 바빠져서 못 가봤어. 미안."

"아.....도시 가기로 했구나."

"응, 일단 테스트는 볼까 해."

엘리는 애써 미소지으며 이안을 바라본다. "잘 생각했어. 응원할게."

이안도 미소짓는다. "고마워 엘리."


엘리가 고개를 푹 숙인 뒤 이안이가 자리를 뜨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다른 친구가 있었다.

조용한 사슴 소년 루카.

루카는 주머니 속에 넣어둔 앞발을, 힘을 주어 꾸욱 잡는다.



하교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아이들은 우르르르 교문으로 빠져 나간다.

엘리는 조용히 가방을 메고 운동장을 걸어간다. 고개를 숙이고, 힘없는 걸음걸이다.

그 때, 한 친구가 엘리 옆에 선다. 루카다.

"어, 루카. 안녕."

"왜 이렇게 힘 없이 걸어."

"그냥..."

"밥 좀 챙겨 먹고 다녀."

"......"

"엘리, 있잖아."

"응?"

"...너, 제라늄 꽃말 알아?"

"어...? 아니?"

"하나는 우정이고, 또 하나는 행복..."

"루카, 네가 그 꽃..."

루카가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엘리, 너 살 안 빼도 괜찮아. 진짜로... 그러니까, 너 그대로 예쁘다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루카가 가방을 바짝 메고 저 멀리 달려가 버린다.


멍하니 있던 엘리가 달려가는 루카를 큰 소리로 부른다.

"루카!!!!"

달려가다가 멈칫하는 루카.

"고마워!"

루카는 그런 엘리를 보며 씨익 웃는다.




집에 돌아온 엘리는 책상 위에 꽂아둔 제라늄을 한 번 쳐다본다.

'꽃말이라고?'

검색창에 '제라늄 꽃말'이라고 써 넣은 화면 밑에는 몇 개의 단어가 뜬다.

'제라늄의 꽃말은 우정, 행복...그리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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