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칸딘스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우리가 음악적 추상으로 잘 알고 있는 러시아 태생의 화가입니다. 칸딘스키는 1908년 독일 뮌헨에 자리 잡기 이전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후기 인상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회화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의 재현이 색채와 연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 회화에서 색채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칸딘스키는 표면적으로 추상으로 보이지만 그는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색채로 그 감정과 정신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정신성의 조화”는 칸딘스키 회화에서 매우 중요해지고, 소더비 경매에서 거래된 이 작품은 칸딘스키가 이를 추구해 나가는 과도기에 그린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잘 보이듯 칸딘스키는 자연의 풍경을 추상적으로 재현함에 있어서 색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종국에는 화면의 평면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023년 (소더비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미술품 베스트 10, 9위(약 580억원)에 낙찰됩니다. _2023 아트맵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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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술 기법, 역사적 배경 등 일체의 객관적 사실을 배제한 하루키의 감각과 추상표현으로 쓴 감상입니다.)
+ 하루키 감상
러시아를 떠나 뮌헨에서 회화를 공부하던 칸딘스키는 1904년 뮌헨의 외곽, 바이에른의 전원마을인 무르나우 Murnau를 발견합니다. 당시 그가 남긴 무르나우Murnau에 대한 감상은 이렇습니다.
'매우 아름답습니다. 구름, 어스름한 암자색 숲, 빛나는 흰색 건물, 교회의 벨벳처럼 깊은 지붕, 나뭇잎의 포화된 녹색이 나에게 남아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것들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 Kandinsky: The Path to Abstraction (전시 카탈로그), Tate Modern, London 및 Kunstmuseum, Basel, 2006-07, p. 209에서 인용)
하지만, 바쁜 일상과 학업으로 무르나우Murnau를 잊고 지냅니다. 1908년 칸딘스키는 추상화에 대한 이론적 아이디어는 어느 정도 완성했지만 막상 그림으로는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하얀 캔버스 앞에 멍하니 시간만 보낼 뿐입니다.
"무엇을 그려야 하지?"
그해 7월 싱그러운 여름 어느 날, 예술적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가브리엘 뮌터Gabriele Münter*와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달리다 멀리까지 나오게 됩니다. 우연히 도착한 무르나우Murnau. 자전거를 멈추고 언덕에서 무르나우Murnau를 본 칸딘스키. 강렬한 영감에 얻어맞은 듯한 전율을 느낍니다.
* 가브리엘 뮌터Gabriele Münter는 독일 여성 표현주의 화가로 칸딘스키와 연인 관계였으며, 예술적으로도 협력했습니다. 그들의 파트너십은 표현주의와 추상 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합니다. 한때 그녀에 대한 평가가 축소되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1909년 가브리엘 뮌터는 작년에 칸딘스키가 무르나우Murnau에서 영감 받았다는 것을 감지해 칸딘스키를 위해 무르나우Murnau에 주택을 구입합니다. 매년 칸딘스키와 뮌터는 몇 달씩 그 집에서 함께 보냅니다. 칸딘스키는 기이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뮌터는 경이로움을 느끼는 한편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추상화를 그립니다. 그렇게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칸딘스키 추상화의 서막이 열립니다.
칸딘스키에 대한 그의 유명한 논문에서 Will Grohmann은 1910년을 예술가의 '추상에 대한 획기적인 돌파구'를 기록한 해로 묘사했습니다(W. Grohmann, Wassily Kandinsky. Life and Work , New York, 1958, p. 62). 규모와 색상 및 형태의 장엄한 감각을 결합한 <무르나우 미트 키르헤 IIMurnau mit Kirche II>는 이 중요한 순간의 성과를 구현합니다. _소더비 인용
1910년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합니다. <무르나우 미트 키르헤 IIMurnau mit Kirche II> 이 풍경화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세 가지 주요 단계:
2차 원성 달성을 통한 원근법의 극복,
유화에 그래픽 요소의 새로운 적용,
선과 색의 분리를 통한 새로운 '떠다니는 공간'의 창조'
(P. Weiss in Kandinsky in 뮌헨 (전시 카탈로그),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1982, p. 59)
&
1. 무르나우Murnau에는 (어렸을 적) 칸딘스키가 러시아에서 가족과 함께 살면서 보았던 러시아 정교회 풍의 양파 돔 모양의 교회가 있습니다. 칸딘스키는 무르나우Murnau의 교회를 볼 때마다 심한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어릴 적 보았던 교회와 풍경이 겹쳐지면서 환각을 경험합니다.
2. 즉시 스케치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교회를 그렸고, 산과 나무, 지붕들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속도가 나지 않아 오후 늦게까지 그렸습니다. 스케치는 완성되었지만 붓 들기를 주저합니다. 이대로 색을 칠하면,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 문득 스케치 위로 햇빛의 반짝임을 깨닫습니다. 멍하니 반짝임을 보다 고개를 들었습니다. 멀리 교회가 보였고, 교회 뒤편으로 산과 하늘이 빨갛게 하얗게 파랗게 물들었습니다.
3. 칸딘스키는 즉시 새 캔버스를 꺼내 무턱대고 색을 칠합니다. 얼마쯤 (1분? 2분?) 흘렀을까, 그림을 완성합니다. 형태도, 구도도 없습니다. 어렴풋함과 흘러내리는 듯한, 모호함의 흩어짐
4. 미완이라는 느낌에 색과 색 사이의 경계에 굵은 선을 긋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그림은 또한번 변했고 완성됩니다. 풍경과 색, 자신이 느꼈던(기억, 경험, 감정 등) 교회의 다양한 이미지를 담은 추상*을,
* 추상(抽象)은 사물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사물이 지닌 여러 가지 측면 가운데서 특정한 측면만을 가려내어 포착하는 것
* 화가 -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Wassilyevich Kandinsky[a] (1866 – 1944, 러시아)
+ 전기(1866 ~ 1908)
칸딘스키는 1866년 러시아(구 소련) 모스크바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혈통은 유전적으로 유럽인이면서 아시아인이기도 했습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합니다. 하지만 그림과 음악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고, 초기에는 러시아 민화, 유럽 아방가르드 스타일 예술에 관심 있었습니다.
1896년(30세) 칸딘스키는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뮌헨으로 이주합니다. 사립 미술 학교에 등록하고 나중에는 뮌헨 아카데미에도 등록합니다. 이 기간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 아르누보, 신인상주의, 표현주의, 야수파 등의 영향을 받습니다.
+ 중기(1909 ~ 1932)
1909년 칸딘스키는 추상화로 스타일을 전환합니다. 여성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와의 교류, 무르나우(Murnau)에서의 시간은 이러한 변화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는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을 묘사하지 않고도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음악과 유사한 회화의 "시각적 언어"의 개발을 목표로 합니다. 이 시기 청기사파*를 만들어 활동하였고, 이름을 알립니다.
*1912년 칸딘스키와 마르크가 피퍼 서점에서 간행한 잡지 《청기사》(The Blue Rider)에서 유래한 독일 표현주의의 주요한 유파입니다. '청기사'라는 명칭은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했던 두 요소인 푸른색과 말을 상징합니다.
칸딘스키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짧은 기간 동안 러시아(구 소련)로 돌아갑니다. 1917년 니나 안드레브스카야Nina Andreevskaya와 재혼을 했고, 모스크바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지만 공산당과의 관계는 악화됩니다.
1922년 칸딘스키는 독일 바이마르에 있는 바우하우스 학교 교수가 됩니다. 그는 형태와 색상에 대한 강의와 벽화 워크숍 강의를 하였고, 이 시기는 그의 색 이론과 추상 미술의 탐구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가 됩니다.
+ 후기(1933 ~ 1944)
나치가 바우하우스를 폐쇄하고 자신의 예술을 "퇴폐적"이라고 비난하자, 칸딘스키는 1933년 파리로 이주, 1939년에 프랑스 시민이 됩니다. 1944년(78번째 생일 전날) 프랑스에서 사망합니다.
+ 비평적 관점
일부 비평가들은 하기와 같이 비판합니다.
▶ 감정적 공명의 부족: 칸딘스키의 추상 작품에는 전통적인 비유 예술에서 발견되는 감정적 깊이와 공명이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의 추상적인 형태와 색상의 사용이 혁신적이긴 하지만 때로는 감정적 수준에서 관객과 깊이 연결되지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 과도한 지성화: 칸딘스키의 예술과 저작, 특히 그의 이론적 논문 "예술의 정신에 관하여"는 일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의 철학적이고 다소 난해한 접근 방식이 그의 예술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만들고 예술의 본능적 경험에서 분리시킨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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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특징
1. 표현주의
초기 칸딘스키는 러시아 배경의 풍경과 민속 장면을 주로 그렸습니다. 인상주의, 야수파 및 더 넓은 표현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세부적인 표현보다는 대상의 정서적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2. 추상화
점진적으로 추상 구성으로 전환하기 시작합니다. 칸딘스키는 형태를 기하학적인 형태와 선으로 분해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구조와 감정 면에서 음악적 편곡과 유사한 시각적 구성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자신의 예술과 음악 사이의 유사점을 자주 그렸습니다.
3. 기하학적 추상화
말기, 특히 바우하우스에 있는 동안 칸딘스키의 예술은 정확한 형태와 명확하고 선형적인 구조에 초점을 맞춰 기하학적으로 더욱 추상화됩니다. 그의 구성은 더욱 복잡해졌으며 깊이감과 역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냅니다.
1906 ~ 1910년 사이의 칸딘스키의 그림입니다. 점차 추상화로의 변화가 느껴집니다. 인상적입니다.
"이 작품은 하이든답게 해주는 본질이자 정수다.
여러분이 이 곡에서 출발해
하이든의 더 많은 작품을 들었으면 한다." _1일 1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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