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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Jan 04. 2024

언제나 같은 마음일 수는 없겠지만

반려견-반려인, 서열보다 깊은 마음


강아지에게 서열이 있다 없다 말도 많지만, 우리 집 마루는 호불호가 명확한 강아지다. 마루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은 바로 나!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회사로, 아이들이 학교로 집을 나서고 나면 마루와 나는 서로를 독차지하기 때문이다. 아직 온기가 따스한 침대로 기어들어가 서로 꼭 맞대어 쉬기도 하고, 너 한 입 나 한 입 아침을 나눠먹기도 한다. 글 작업을 하거나 줌미팅을 할 때면 언제나 내 다리 위에 올라 와 콜콜 자는 마루. '강아지 강 씨'라 불리는 강형욱 훈련사는 말했다. 강아지들이 먹을 걸 주는 사람을 제일 좋아할 것 같지만 사실 산책시키는 사람이 제일이라고. 하루 30분 남짓 꼬박꼬박 산책시켜주는 사람도 나님이시니 마루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음은 남편. 마루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지극하나 현실적인 시간 투여에서 밀린 감이 있다. 퇴근 후 마루가 혓바닥으로 얼굴세수를 시켜주는 것을 보면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서 차이가 나는 법. 바로 늦은 밤 마루가 피곤할 때다. 남편이 만지려고 하면 으르르렁 거리지만 내가 만져주면 조용히 쓰다듬는 손길을 즐기는 마루. '흐흐... 역시 나야!' 씨익 웃으며 잠시나마 승리감에 도취된다. 아들 둘 열심히 키웠지만 커갈수록 농구, 마블 시리즈 등 아빠와 공유하는 취미가 많아지면서 가족 내에서 점점 좁아졌던 나의 입지가 강아지의 등장으로 전복되었다. 두 아이는 입을 모아 외치곤 했다.


"마루는 엄마만 좋아해!"


그런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던 내 콧대가 와장창 무너진 날이 찾아왔다.


내 배 위에서 주로 주무시는 분




영국에서 함께 살던 사촌동생이 잠시 귀국을 했다. 그녀의 동생, 그러니까 내 외사촌 동생 둘이 집에 놀러 와 함께 이른 크리스마스 디너를 먹기로 한 날이다. 그중 반려견과 함께 사는 S의 방문에 우리 마루가 마음을 홀랑 뺏겨버린 것이다. 초보견주인 우리와 달리 강아지가 손이 잘 닿지 않는 날갯죽지와 엉덩이를 확실하게 긁어주는 노련한 손길을 경험한 뒤로는 마루는 S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분주한 나와 남편을 대신에 마루와 놀아주는 S가 고마웠는데 이내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기껏 차린 음식을 맛있고 편안하게 즐기라고 부른 손님인데 마루를 신경 쓰느라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루야, 이제 엄마에게 와~!" 슬쩍 나를 쳐다볼 뿐 불러도 오지 않는 마루. 안 되겠다 비장의 무기, 간식을 꺼냈다. 역시 초롱초롱한 눈으로 달려오는 너. 근데 어랏, 간식만 홀랑 먹고 다시 S에게로 간다. 몇 번 더 시도해 봤지만 간식만 먹고 고개를 돌려 이모에게도 달려가는 너. 잠시 안을 틈조차 주지 않았다. 슬슬 마음이 상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모 손길이 좋다지만, 너어... 정말 이럴 거야? 칫, 치와와의 충성심이란 이리도 얄팍한 거였구나. 짝사랑이었어. 흥칫뿡!


즐거웠던 크리스마스 파티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교회 가는 길에 여태 풀리지 않는 마음을 고해성사하듯 둘째에게 털어놓았다.


"선우야, 어제 마루가 이모에게만 가고, 엄마에겐 아예 오지도 않는 거야. 간식만 먹고 도망가고... 그래서 아직 엄마가 마루에게 삐쳐있어."

"엄마도 이제 마루에게 외면받는 제 마음을 알겠네요. 찬밥 신세..."


마음이 아려왔다. 누구보다도 마루를 아끼고 좋아하지만 정작 마루의 마음을 얻지 못한 선우. 시크한 선율이와 달리 마루를 자꾸 귀찮게 해서일까? 아님 정말 서열이라는 게 작동하는 걸까? 유독 선우에게만 으르렁 거리곤 한다. 아무리 강아지에게라지만 '외면', '찬밥 신세'라는 말이 바짝 마른 수건처럼 마음의 표면을 긁고 지나갔다. 잠시 침묵에 잠긴 뒤 다시 물었다.


"그럼... 선우는 그 마음으로 어떻게 견뎌?"

"It doesn't always have to be a two way street."


어느 영어책에서 나온 문장이라나. 마치 준비한 듯이 답을 꺼내는 아이의 말을 머릿속에서 바로 받아 적었다. 항상 같은 마음일 필요는 없다...


"그래도... 매일 그러면 선우도 상처받잖아."

"괜찮아요. 마루니까요."


와... 나보다 더 크고 깊은 아이의 마음에 놀랐다. 이럴 때면 우리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자랐나 새삼 감탄하게 된다. 이어서 언제나 내 맘 같지 않았던 관계들이 떠올랐다. 정말 좋아했지만 멀어져 버린 사람, 작은 실수로 다시 못 보게 된 사람, 사과해도 답이 없는 사람, 마음속 서랍 속에 넣어두고 닫아놓은 사람들... 그래, 항상 같은 마음일 필요는 없지. 상대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되는 거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이미 저 마치 앞서 뛰어가는 아이의 등을 보며 속삭였다. 선우야, 언젠가 마루도 너의 진심을 알아줄 거야. 아니 마루는 영영 모르더라도 내가 알아줄게. 엄마가 알아줄게… 그래서 기록해 놓는다. 나의 좁음과 너의 넓음을. 서열조차 무화시켜 버리는 너의 한결같은 사랑을.


다시 시작되는 새해, 묵은 감정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같은 마음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너니까, 너라서. 마루니까, 마루라서. 고운 말들을 가슴속에, 글 속에 꽃씨처럼 심어놓고서 환하게 필 날을 기다려본다.


귀여움 더하기 귀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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