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휘슬러의 삶
휘슬러의 삶은 단조롭다. 주어진 스케줄에 따라 일을 하고, 적당히 쉬며, 때가 되면 밥을 먹는 것. 비수기에는 호텔에서 받은 스케줄이 적다. 그만큼 쉬는 날이 많다는 뜻이다. 쉬는 날엔 보통 느긋하게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일어나 보니 중천에 뜬 해가 블라인드 사이로 빛을 비추고 있었다.
내 침대에는 전기장판이 켜져 있다. 겨울에 추운 캐나다에선 필수템이다. 전기장판이 장착되어있는 침대는 중력이 다른 곳보다 몇 배나 크게 작용해 내 몸을 도저히 일어날 수 없게 한다. 그 상태에서 핸드폰을 하며 뒹굴다 보면 한두 시간은 금방이다. 그러나 배에서는 알람 소리가 울린다. 그 꼬르륵이란 알람은 중력을 무시하게 만들며 나를 조금 부지런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누가 음식을 해주는 사람이 있거나, 배달이 잘 되어있는 곳이 아니기에 직접 음식을 해 먹어야 한다. 그렇게 무거운 이불을 치워내고 주방으로 나온다.
휘슬러에서 나는 보통 라면을 먹거나, 6불짜리 목살을 구워 먹는다. 음식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기와 라면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단조로운 식단은 나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목살을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린다. 치이 이익 소리는 나의 배고픔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빨리 목살이 익게 만들고 싶지만, 모든 일에 때가 있는 것처럼 기다림은 필수다. 센 불에 목살의 양면을 노릇노릇하게 구워주고 중간 불로 바꾼 후 안의 살들을 익혀준다. 이렇게 잘 구워주면 겉은 바삭하면서 안에서는 고기의 육즙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화구에선 물을 끓이고 있다. 고기의 느끼함을 잡아주기 위한 비빔면을 만들기 위함이다.
고기들이 다 익고 비빔면의 면들도 다 익었다. 이런 극강의 조합을 이길 캐나다 음식은 없다. 특히 휘슬러엔 더욱 없다. 그 둘을 적절하게 배분하여 먹으면 하루의 한 끼가 끝이 난다. 우리 집 주방은 공용으로 쓴다. 다른 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거지를 미루지 않고 해야 한다. 설거지를 하며 유튜브로 좋아하는 노래를 재생한다. 이런 날은 내지르지 노래보다는 읊조리는 노래가 어울린다. 주방 한쪽에선 아메리카노를 내리고 있다. 설거지가 마무리될 때 즈음 커피머신에는 연기가 떠오른다. 아메리카노가 완성되어있다. 그 커피를 나의 전용 컵에 따른다. 컵을 가지고 집 앞마당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는다. 앞에는 마당과 함께 나무들이 있다. 노래는 계속 흐르고 있고, 방금 내린 커피를 음미한다. 흠.. 조금은 싱겁다. 물 조절 실패가 그 원인이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이 여유가 중요한 것이다. 얼마만의 소중한 여유인가. 행복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이 순간에 몰입한다.
캐나다가 가장 부러운 이유는 이런 여유다. 한국에서의 삶을 복기해보면, 이런 마음이 편한 여유를 즐긴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놀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고, 뭔가 뒤쳐진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의 여유는 잉여가 되었고, 잉여는 곧 무능력을 나타내며,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항상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를 배워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으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 안정적인 삶을 이뤄야 했다. 그러나 캐나다에는 현재의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름엔 호수에 나가 햇빛 아래에 누워있거나 수영을 하며, 겨울엔 스키나 보드를 즐긴다. 그것은 잉여가 아닌 여유였고, 순간을 사는 것이었다.
이렇게 휘슬러는 나에게 순간을 살 수 있는 법을 가르쳐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