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유연해져 볼까?
역사는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서 인간은 언제부터 왜 인간인지 그 기원을 먼저 묻는다.
인류 전체가 우주의 먼지 같았던 시절, 그 이전의 아득한 시간까지 애써 거슬러 올라가 본다. 100년 전, 1000년 전 정도는 조선 시대, 삼국 시대 등 구체화시킬 수 있어 상상이 가능한데, 148억 년 전, 45억 년 전은 너무너무너무 멀어 상상의 영역이 아닌 것만 같다. 그럼에도 사피엔스 조상님이 우리 후손에게 남겨준 상상력의 힘을 믿고 그런 시간, 공간을 감히 가늠해 본다.
수업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에서 시작하지만 문장 내용 자체가 오류임을 학생들과 공유한다.
’아무것도 없는데 세상이 있는 거잖아?’, ’빅뱅 점은 무에서 점만큼의 시공간이 생긴 것인지 어떤 시공간이 존재한 상황에 첫 물질이 생겨난 것인지?’ 같은 의문이 들면 ‘우주‘라는 게 우리가 경험한 3차원 세계의 감각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모른다‘의 세계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알 수 없다‘를 받아들이면 비로소 겸손한 태도로 인간이 인간이기까지의 과정을 탐구할 준비가 된다. 심지어 빅뱅으로 시작된 우주에 있는 1000억 개의 은하계, 그중 1개 은하계에 속한 1000억 개의 별과 행성들, 그중 지구 속에 다른 생명체 빼고 인간만 80억 명, 그중 하나가 ’나’라는 사실은 나라는 개인이 얼마나 먼지 같은 존재인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최단시간에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인지의 질문을 동시에 들게 한다.
빅뱅, 우주, 지구, 박테리아(균), 바다생물, 육지생물, 침팬지… 인간 직전까지 진화론에 입각해 살피다 보면, 학생들은 질문한다. “저거,, 아니 저분들 다 우리 조상님이에요?” 가끔 박테리아(균) 사진을 앞에 두고 인사도 올린다. “안녕하세요?” 한 학생은 친구에게 “야, 그럼 우리는 그동안 조상님한테 올리는 제사상에 조상님인 물고기를 올리고 있었던 거였어!”라며 범죄라도 저지른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이 독립되기까지 많은 우연이 쌓인다고 한다. 독립되었더라도 그중 99%는 멸종한다고도 하고.
단순하게 말하면, 침팬지가 딸 둘을 낳아 첫째는 엄마와 동일한 유전자, 둘째는 엄마와 아주 조금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 무수히 반복되어야 ‘인간‘ 1일 차가 될 수 있다는 것. 물론 그 과정에서 침팬지와 인간이 서로를 다른 존재로 인식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유전자적 특성 말고 인간이 명확하게 침팬지나 다른 네발짐승과 다른 특성은 또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학생들은 알고 있던 지식을 총동원해 답을 맞혀 본다.
손!
2족 보행!
생각!
말!
도구!
불!
…
나온 답들을 가능하게 한 첫 시작을 더 찾는다.
두 앞발이 두 손이 될 수 있었던 시작,
생각을 하고 말을 해서 언어가 생긴 시작,
불을 창조하게 된 시작,
도구를 제작하게 된 시작을.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인간은 네 발로 딛고 있던 땅에서 두 앞발을 떼고 허리를 ’읏쨔‘하고 폈다.
모든 것의 시작, 직립! 바로 서기!
달라진 시야로 인간은 벌러덩 드러눕지 않아도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대가로 허리 디스크와 좁아진 골반을 얻었다.
허리를 왜 폈는지의 이유는 추측할 뿐이다. 직립한 최초의 인류들이 왜 바로 서고 싶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직립이 이후의 많은 변화들을 이끌어낼 것을 계획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몇백만 년 전의 인류가 “직립해서 두 손을 자유롭게 한 뒤 도구를 제작하고 불을 써야지! 그리고 뇌를 발달시켜서 언어로 의사소통해 다른 생물들을 이겨야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과 무계획.
이것이 인간의 시작점에 있던 거라면, ‘인간이라서 같은 것‘을 우리도 가지고 있다고 친다면, 우리 조금 더 유연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의외로 내가 계획하지 않은 일이 내 삶의 방향을 살짝 틀어주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일 아니고 해야만 하는 의무 같은 일이 내 능력치를 끌어올리거나 나도 모르던 나의 능력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니 열려있자고 아이들에게 제안해 본다. 자연과 우주와 세상이 나와 연결되고자 하는 부분에 기꺼이 수동적이어 보자고. 자아가 너무 비대해지면 할 수 없는 일이라서 ‘나는 옳지 않다’라는 전제를 품고 있는 게 큰 도움이 된다고 팁도 건넨다. 15살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이려나? 사실 나에게도 하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