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아침은 더 차가웠다.
엘레나는 눈을 뜨자마자 천장을 보지 않았다. 손부터 확인했다.
손바닥 한가운데, 완성되지 못한 숫자가 금빛으로 남아 있었다. 1000이 되지 못한 선. 어제 하루가 지워졌다면 이것도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선은 피부 아래에 박힌 가시처럼 그대로였다.
창밖에서는 같은 종소리가 울렸다.
한 번.
아침 여덟 시.
엘레나는 침대 옆으로 손을 뻗었다. 어젯밤 잠들기 전, 침대 다리 안쪽에 손톱으로 긁어 둔 표시가 있었다. 손가락 끝에 거친 홈이 닿았다.
하나.
어제는 있었다.
오늘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제 적어 둔 메모도, 금서실에서 훔쳐본 기록의 번호도, 카이가 말한 재설정 조건도 모두 사라졌다. 종이와 잉크는 하루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몸에 남긴 것은 버텼다.
엘레나는 손바닥을 쥐었다.
"좋아."
목소리가 작게 갈라졌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움직여."
복도는 어제와 같았다. 왼쪽 방의 문이 열리고, 머리를 땋다 만 2학년 학생이 뛰어나왔다. 계단 아래에서는 누군가 잉크병을 떨어뜨렸다. 파란 잉크가 돌바닥에 번지는 모양까지 같았다.
엘레나는 멈추지 않았다.
어제라면 이요라를 찾아 달려갔을 것이다. 오늘은 식당으로 향했다. 그녀가 늘 앉던 긴 테이블을 지나 일부러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는 다른 학생의 자리였다.
"엘레나?"
마라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너 거기 앉아도 돼?"
"오늘은 돼."
"오늘은?"
마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엘레나는 빵을 반으로 찢었다. 안쪽에 박힌 건포도 수가 어제와 같았다. 다섯 개.
"마라."
"응?"
"내가 오늘 점심 전에 사라지면, 나를 찾지 말고 이요라 마스터에게 가."
마라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빠졌다.
"무슨 일인데?"
"대답부터 해 줘."
"네가 사라지면 이요라 마스터에게 간다. 됐어?"
"그리고 내가 잊혀진 섬 얘기를 하면 믿어?"
마라는 빵을 내려놓았다.
"그게 어디야?"
엘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라가 낮게 말했다.
"또 뭔가 들은 거지?"
그 질문에는 어제와 다른 것이 있었다. 마라는 섬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엘레나가 바람을 듣고, 바람 때문에 다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워진 사건 밖에 남은 관계가 있었다.
엘레나는 그걸 붙잡았다.
"나중에 설명할게."
"그 말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알아."
"그래도 가야 해?"
"응."
마라는 한숨을 내쉬더니 자기 빵을 엘레나의 쟁반에 올려놓았다.
"그럼 먹고 가. 네가 세계의 비밀을 캐든, 교수님한테 혼나든, 빈속으로 하면 더 짜증 나."
엘레나는 웃지 못했다. 대신 빵을 손에 쥐었다.
"고마워."
"나중에 꼭 설명해."
"약속할게."
약속이라는 말이 입안에서 무거웠다. 하루가 다시 지워지면 마라는 이 대화를 잊을 것이다. 그래도 엘레나는 말했다. 누군가에게 지켜야 할 말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몸이 앞으로 움직였다.
이요라는 동쪽 강의동 앞에 있었다.
그녀는 어제와 같은 은빛 로브를 입고, 어제와 같은 학생 명단을 들고 있었다. 바람이 없는 아카데미에서 로브 끝만 흔들렸다. 엘레나는 그 흔들림이 진짜 바람인지, 이요라가 만든 습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엘레나."
이요라가 먼저 이름을 불렀다.
"오늘 수업 전 면담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어제와 같은 첫마디였다.
엘레나는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 잊혀진 섬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요."
이요라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어디서 들었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모르는 이름은 아니다.
엘레나는 그 반응을 머릿속에 새겼다.
"금서실 기록에서 봤어요."
"금서실 출입은 여전히 금지다."
"태양석도 금지된 물건인가요?"
이번에는 대답이 오래 늦어졌다.
이요라는 명단을 덮었다.
"태양석은 학생이 다룰 물건이 아니다."
"그럼 아카데미가 다루나요?"
"질문을 바꿔라."
"마스터가 저를 섬으로 보냈나요?"
이요라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나는 너를 섬으로 보낸 적이 없다."
"보낼 계획은 있었나요?"
"엘레나."
이요라의 목소리에 경고가 섞였다.
"네 힘이 깨어난 뒤로, 너는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보려 한다. 하지만 모든 문은 열기 전에 문턱을 배워야 한다."
"문턱이 아니라 자물쇠겠죠."
엘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이요라의 손가락이 명단 끝을 눌렀다.
"누가 그런 말을 했니?"
"제가요."
"아니. 네가 그런 비유를 직접 떠올렸을 리 없다."
그 말이 엘레나의 가슴을 찔렀다.
직접 떠올렸을 리 없다.
그녀가 만든 말이 아니라는 뜻인가. 아니면 그녀 자신이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이요라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인가.
엘레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스터는 잊었지만, 저는 기억해요."
"무엇을?"
"섬. 폭풍의 심장. 제단. 태양석 조각."
이요라는 엘레나를 똑바로 보았다. 그 눈 안에는 모르는 사람의 당혹감이 아니라, 알고도 잠근 사람의 계산이 있었다.
"그 기억을 누구와 공유하고 있지?"
엘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요라가 낮게 말했다.
"카이를 조심해라."
"왜요?"
"그 아이는 너무 많이 살아남았다."
엘레나는 책상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마스터도 알고 계시네요."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지?"
"카이가 반복을 기억한다는 것."
이요라는 곧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엘레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여쭐게요."
"엘레나."
"네."
"네 손에 남은 표식은 남에게 보이지 마라."
엘레나는 손을 감췄다.
"왜요?"
"아카데미에는 네가 깨어나기를 기다린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까."
이번에는 이요라가 먼저 돌아섰다.
엘레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 가지를 확신했다. 이요라는 섬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섬으로 이어지는 길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을 감추고 있다.
카이는 금서실 앞에 있었다.
어제와 달리 문 옆에 기대 있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소매는 걷혀 있었고, 왼팔 안쪽에는 짧은 선들이 여러 개 그어져 있었다. 잉크가 아니라 얕은 상처였다.
엘레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걸로 기록해요?"
카이는 고개를 들었다.
"종이는 사라져."
"상처는 남고요."
"아직은."
엘레나는 그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다섯 개의 선이 한 묶음으로 묶여 있었다. 그 아래에 오늘 아침 새로 긁은 듯한 선 하나가 더 있었다.
"이게 몇 번째예요?"
"이번 구조에서는 두 번째."
"구조?"
"전체 반복이 아니라 부분 반복. 섬 이후부터 아카데미가 같은 하루를 다시 재생하고 있어."
카이는 바닥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금서실 문 앞 먼지가 얇게 밀렸다.
"큰 원이 있어. 그 안에서 작은 원이 돌아. 999는 큰 원의 실패 횟수에 가깝고, 지금 우리가 겪는 건 작은 원이야."
"왜 작은 원이 생겼죠?"
"네가 태양석 조각을 제단에 넣었으니까."
엘레나는 눈을 감았다.
폭풍의 심장. 제단. 붉은 빛. 손에서 떨어져 나가던 태양석 조각. 그리고 카이의 목소리.
이번에는, 제발 기억해.
"그때가 재설정 지점이라는 뜻이에요?"
"정확히는 방아쇠."
"그럼 제단이 원인인가요, 태양석이 원인인가요?"
"둘 다. 제단은 문이고, 태양석은 기억을 붙잡는 못이야. 네가 못을 문에 박은 셈이지."
"좋은 비유는 아니네요."
"현상은 더 나빠."
카이는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잠을 자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늘 몇 가지를 확인했어. 첫째, 같은 시각에 같은 일이 일어난다. 둘째, 네가 행동을 바꾸면 사람들의 대답은 변하지만, 핵심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셋째, 이요라는 섬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태양석을 안다."
"저도 확인했어요."
"넷째."
카이는 금서실 문 아래를 가리켰다.
"저건 어제 없었다."
문 아래 틈에서 검은 종이 모서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엘레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금서실의 책들이 그녀를 읽던 밤이 떠올랐다. 삭제된 예언. 삭제자 카이. 마지막 열쇠.
카이가 먼저 몸을 낮췄다.
"만지지 마."
"왜요?"
"너를 부르는 종이일 가능성이 높아."
"그럼 제가 읽어야죠."
"엘레나."
"계속 막기만 하면 아무것도 못 알아내요."
카이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그의 손등에 999가 희미하게 빛났다.
"나는 막는 법밖에 오래 배웠어."
"그럼 이번에는 배우세요."
엘레나는 그를 지나쳐 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검은 종이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피부처럼 미지근했다. 그녀가 모서리를 잡자 손바닥의 1000이 따끔거렸다.
종이를 꺼내는 순간, 금서실 안쪽에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한 장.
또 한 장.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방에서 수백 권의 책이 동시에 깨어나는 소리였다.
엘레나는 종이를 펼쳤다.
글자는 은빛도 금빛도 아니었다. 말라붙은 피처럼 검었다.
두 사람만 남았다.
카이의 얼굴에서 색이 빠졌다.
"무슨 뜻이에요?"
"기억을 가진 사람이 둘뿐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또요?"
"나머지는 이미 지워졌다는 뜻일 수도 있어."
엘레나는 종이를 움켜쥐었다.
"누가 쓴 거죠?"
금서실 안쪽에서 대답 대신 문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닫힌 문 안에서 누군가 손바닥으로 두드린 것처럼.
쿵.
한 번.
카이가 검집에 손을 댔다.
쿵.
두 번.
엘레나의 귀에 바람이 스쳤다. 실제 바람이 아니었다. 말이 되기 직전의 숨결. 아카데미 지하에서 들었던 푸른 바람과 닮았지만, 더 작고 더 어렸다.
카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오늘은 들어가지 않는다."
"왜요?"
"문 너머가 반복의 중심일 때, 준비 없이 들어가면 하루가 아니라 사람이 찢겨."
"그걸 어떻게 알아요?"
카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레나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
"말하지 않은 기억이 아직 많군요."
"많아."
"그중에 제가 알아야 하는 것도 있고요."
"대부분이 그래."
"그럼 말해요."
카이는 닫힌 금서실 문을 보았다.
"네가 다시 나를 믿기로 결정하면."
엘레나는 웃음에 가까운 숨을 뱉었다.
"믿음을 조건으로 진실을 주겠다는 건가요?"
"아니."
카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내 말을 듣고도 무너지지 않을 때 말하겠다는 거야."
"그 판단은 내가 해요."
"그래."
카이는 물러섰다.
"그래서 오늘부터 네가 결정해. 나는 기록하고, 막을 수 있는 건 막고, 네가 묻는 것에는 거짓말하지 않겠다."
"숨기는 건요?"
"숨기면 너는 알아낼 거야."
"그건 대답이 아니에요."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엘레나는 그를 오래 보았다.
카이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더 성가셨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이번 하루에서 엘레나와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은 그뿐이었다.
두 사람만 남았다.
종이의 문장이 손 안에서 뜨거워졌다.
"좋아요."
엘레나는 말했다.
"임시로요."
"임시 동맹?"
"감시 포함."
"받아들이지."
"그리고 다음 반복이 오면, 아침에 바로 여기서 만나요."
"기록은 몸에."
"정보는 말로."
"이요라는?"
"섬은 잊었지만 태양석은 알아요. 그리고 저한테 손 표식을 숨기라고 했어요."
카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누구에게?"
"아카데미에 기다리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그림자 교단."
"아니면 아카데미 안쪽 사람."
카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일 수도 있어."
그들은 그날 하루를 쪼개어 기록했다.
엘레나는 강의실에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교수는 매번 교과서와 같은 답을 했지만, 엘레나가 아르카누스의 이름을 말하자 분필을 부러뜨렸다. 카이는 종탑 아래를 살폈다. 종을 움직이는 장치는 멀쩡했지만, 바닥에 태양석 가루처럼 빛나는 먼지가 남아 있었다.
점심 무렵, 마라는 약속대로 엘레나를 찾으러 왔다.
"너 또 안 먹었지."
"먹었어."
"아침에 내 빵만 먹고?"
엘레나는 잠시 멈췄다.
마라가 그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너..."
"왜 그런 얼굴이야?"
"아니야."
엘레나는 마라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마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내가 빵 줬던가?"
기억이 흔들리고 있었다.
반복이 사람을 통째로 지우는 것이 아니라, 하루 안에서도 조금씩 덮어쓰고 있었다.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줬어."
"그랬나?"
"고마웠어."
마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너 오늘 좀 이상해."
"알아."
"그래도 혼자 다니지 마."
"응."
마라가 떠난 뒤 엘레나는 손바닥을 펴 보았다. 1000의 마지막 획이 조금 더 선명해져 있었다. 숫자가 완성되려는 건지, 아니면 그녀를 완성시키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해가 질 때, 카이는 금서실 앞에서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종이."
엘레나는 품 안에서 검은 종이를 꺼냈다.
문장은 바뀌어 있었다.
두 사람만 남았다.
그 아래에 새 문장이 생겨 있었다.
하나는 문이고, 하나는 칼이다.
엘레나는 문장을 읽고 카이를 보았다.
"문은 저겠죠."
"그럴 가능성이 높아."
"칼은 당신이고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칼은 문을 열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겠네요."
카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글 수도 있어."
"그중 당신은 뭘 했어요?"
"전부."
짧은 대답이었다.
엘레나는 더 묻지 않았다. 오늘은 그 대답을 삼킬 힘만 남아 있었다.
밤이 내려오자 아카데미는 평온해 보였다. 학생들은 기숙사로 돌아갔고, 교수들은 복도를 잠갔다. 이요라는 저녁 점호 때 엘레나의 손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손바닥 위를 지나치지 않고 오래 머물렀다.
엘레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 다리 안쪽에 두 번째 선을 긁었다.
하나.
둘.
그 아래에 짧게 썼다.
금서실. 두 사람. 문과 칼.
칼끝으로 새긴 글자는 삐뚤었다. 그래도 종이보다 오래 남을 것이다.
엘레나는 잠들지 않으려고 했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달빛이 방바닥에 네모난 틀을 만들었다. 손바닥의 1000이 느리게 뛰었다. 심장과 다른 박자였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카이인가.
이요라인가.
아니면 아직 이름을 모르는 누군가인가.
엘레나는 숨을 죽였다.
발소리는 다시 멀어졌다.
그녀는 침대에 앉았다. 잠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눈꺼풀이 무거웠다. 반복은 피로까지 데려왔다. 아니, 피로를 이용해 사람을 같은 끝으로 밀어 넣었다.
엘레나는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아직 안 끝났어."
그때 종탑이 울렸다.
한 번.
밤 여덟 시.
엘레나는 벌떡 일어났다.
종이 다시 울렸다.
한 번.
같은 음.
같은 길이.
같은 시각.
침대 다리 안쪽에 새긴 두 번째 선이 금빛으로 달아올랐다.
그리고 검은 종이가, 닫아 둔 책상 서랍 안에서 스스로 접히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