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도 일어나야 하는 이유
아들이 걸음마를 시작한 후부터였다.
나가서 함께 놀아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불안한 마음들이 커지기 시작했다. 아들은 뒤뚱뒤뚱해도 마냥 웃으며 걷고 뛰기를 반복했다.
아들 뒤에서 전동휠체어 속도를 맞춰가며 따라가지만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내 앞에서 크게 넘어진 아들은 무릎이 까졌는데 우는 아들 앞에서 안을 수가 없었다.
휠체어에서 내린 나는 쭈그린 채 아들을 일으켜 달랬다. 한참을 바라보다 울음을 그친 눈가에는 꼬장 물이 번져 시커메졌다. 무릎에 번지는 피를 닦아주며 나도 모르게 "밖에서 걸으면 위험하잖아" 라며 혼냈다.
내 반응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내 속내는 '아빠가 도와줄 수 없으니까 밖에 나가지 마'였다. 나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한창 뛰고 싶을 나이에 하지 말라는 말만 하는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넘어지는 모습만 바라보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넘어져도 울지 않고 혼자 일어나 내 앞까지 걸어온 후에 우는 것이었다.
마치 넘어져 울고만 있으면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이해한 듯한 행동으로 보였다.
7살이 된 지금도 다르지 않다. 아빠가 등목을 태워주거나 업어줄 수 없으니 휠체어 뒤에 매달려 함께 달리거나 킥보드 속도를 아빠에 맞춰 드리프트를 즐긴다.
아빠와 함께 놀 수 있는 방법. 아빠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는 아들을 보며 주변 사람들은 '아들이 속이 깊다' 혹은 ' 아빠가 장애가 있어서 일찍 철들었다'와 같은 말을 한다.
나 또한 처음 그 말에 동의하였지만 다른 장애인 부모들을 만나며 생각이 바뀌었다. 아이들은 아빠의 '장애'가 아닌 아빠의 '행동'에 적응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싶다.
아빠가 여전히 함께 놀기 주저하거나 불편한 반응을 보인다면 자녀 또한 그 반응에 적응하여 아빠를 멀리하거나 불편해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모든 자녀들은 넘어져 아프면 위로받고 싶고 힘을 얻고 싶어 한다. 아들은 그 방법을 아빠에 맞춰 적응한 것이다.
10년, 20년 후에도 아들은 아빠에게 그렇게 행동할 것이고 나는 그것에 맞는 최선의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래야 아빠다.
이름 최충일.
집에서는 "아빠, 남편, 아들"이고
직장에서는 "선생님",
무대 위에선 "엄지왕자",
친구들은 "쪼까니"(키가 작아서)라 부른다.
그리고 지체 2급 장애인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다양한
호칭과 별명을 갖는다.
그러나 "장애인"은 내게
호칭도 별명도 될 수 없는 단어다.
어릴 때 동네 꼬마들이 놀릴 때 빼고는...
평소 사람들이 "장애인 안녕?"이라고 한 적은 없었다.
"장애인"이란 단어는 나의 삶 가운데
지극히 한정된 상황에서만 불려지는
어색한 "middle name"이다.
중고등학교를 특수학교에서 졸업,
대학생활 힙합에 빠졌고 지금도 사랑한다.
직장이 있고 결혼하여 아빠가 되었다.
삶의 행복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싶다.
장애인이 아닌 아빠, 남편, 래퍼, 직장인, 아들로서 삶의 다양성과 일상을 타이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