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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Oct 28. 2022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보고 싶습니다만

새벽 다섯 시, 일찌감치 바다에 나가 서핑을 하며 일출을 본다. 모래를 털고 숙소로 돌아와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나 근처 카페에서 아침을 먹으며 노트북을 켠다. 일을 하다가 집중이 잘 되지 않으면 수영장에 뛰어들거나 요가 매트를 펼쳐 몸을 움직인다. 저녁에는 노을을 보며 새로 만난 친구들과 맥주 한 잔을 하는 삶. 그렇다, 상상이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는 삶을 꿈꾼 적이 있긴 하다. 아이를 낳고 프리랜서가 되었지만 ‘프리’와는 거리가 먼 워킹맘이라, 디지털 노마드는 ‘로또가 되면 뭐하지?’ 같은 재질의 꿈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발리의 또 다른 애칭이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라는 것 역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발리에 혼자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쩌다 보니 남편도 아이도 없이 온전히 혼자서 24시간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마침 나는 원격 근무가 너무나 가능한 프리랜서 편집자이며, 하필 이곳은 발리였다. 특히 발리의 짱구 지역은 노마드 리스트(Nomad List)라는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몇 년째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숙소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20분 정도면 짱구의 어디든 가 닿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체험해봐야지.


매일 하루에 두 번씩 파도를 타느라 꾸따를 벗어나 본 적 없는 3년 전과 달리, 이번 여행에서는 빨리 라인업에 진출해 새벽에 한 번만 서핑을 하고 오후에는 짱구의 코워킹 스페이스나 카페를 드나들며 일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다행히 며칠 만에 디지털 노마드 체험은 현실이 되었다. 새벽 다섯 시, 여섯 시, 여덟 시… 파도 상황에 따라 시간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른 아침에 서핑을 한 뒤 노트북을 챙겨 부랴부랴 오토바이를 타고 카페로 향했다.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시키고 빵빵한 와이파이에 감탄하며 일을 깔짝거린다. 듣던 대로 카페에는 노트북을 펼치고 일하는 외국인이 꽤 많다. 그 사이에서 나도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즐겁고, 이것이 디지털 노마드의 삶인가 하며 들뜨는 것도 잠시, 본격적으로 일에 집중하면 여기가 합정동 카페인지 발리 카페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며칠간 디지털 노마드 흉내를 내며 알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 일을 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야 한다

- 카페는 한국 물가와 비슷하다

- 일은 어디서 해도 일이다


수확이 있다면, 한국에 두고 올 뻔한 일을 조금이나마 진행했다는 것과 진짜 디지털 노마드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스타트업을 운영한다는 두바이 친구는 3개월째 발리에 머무는 중이라고 했다. 두바이의 여름이 너무 뜨거워 세계 곳곳을 다니는 중이라고, 언젠가 서울에도 가보고 싶다며 대뜸 서울은 언제가 가장 좋냐고 물었다. 당장 올가을에 오라고 꼬셨는데 진짜 올는지 모르겠다. 8개월째 발리에 거주 중인 호주 친구는 꽤 만족스럽게 일과 여행을 병행 중이라고 했다. 주중엔 짱구에 머물다가 주말엔 근교 여행을 하는 듯했다. 8개월 정도면 병행이 되려나, 역시나 해봐야 알 일이다. 언젠가 해볼 기회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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