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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Oct 28. 2022

파도를 기다리며

유와 선생님들이 모여서 작당 모의를 한다.

“이제 어느 정도 됐으니 ‘물뽕’을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럼, 자 보자, 내일 파도가….”

잠시 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한다.

“은지님, 내일은 새벽에 나오시죠. 라인업 갑시다.”


라인업이란 먼바다에서 파도를 기다리는 지점을 의미한다. 화이트 워시에서 서핑에 필요한 기본적인 동작을 익혔다면, 이제 라인업에서 그린 웨이브(파도가 깨지기 직전 녹색으로 보이는 파도)를 탈 차례다. 라인업 출전을 앞두고 지상에서 이론 교육을 다시 받았다. 다른 건 둘째 치고, 파도가 덮쳐올 때 멍 때리지 말고 잽싸게 패들링을 해서 파도 가까이로 들어가라, 그리곤 무조건 에스키모 롤(파도가 칠 때 보드를 잡고 뒤집어 바닷속으로 피하는 방법. 거북이가 뒤집는 모양이랑 비슷하다고 해서 터틀 롤이라고도 불린다)! 그것만 기억하라고 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입수했다.


수영에는 자신이 있었다. 서프보드에 엎드린 채로 바다를 건넌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어둑한 해변에서 파도가 시작하는 곳으로. 낭만에 젖어 열심히 팔을 젓다가, 이내 바다 수영은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 수영은 수영장에서만 유용한 것이었다. 같이 출발했는데 어느새 저 멀리 라인업에 도착해 손짓하는 강사를 아득한 마음으로 쳐다보다가 별수 없이 계속 팔을 움직였다. ‘패들링 지옥’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일까. 이러다 팔이 떨어지겠다 싶을 때쯤 파도를 만났다. 화이트 워시에서 만난 건 정말 거품에 불과했구나 싶은 크고 단단한 파도.  


태어나 그렇게 큰 파도는 처음 봤다. ‘큰 파도 오면 빠르게 패들링, 보드 잡고 뒤집어서 에스키모롤!’ 내내 중얼거렸는데도 막상 큰 파도를 만나자 얼어붙고 말았다. 주변 서퍼들이 패들링 하라고 소리쳐 정신을 차리고 에스키모롤을 했다. 그렇게 ‘통돌이(Wipe out 파도에 말리는 것. 파도에 말리면 세탁기가 돌아가듯이 물속에서 빙빙 돌게 된다고 통돌이 당한다고 표현한다)’를 당했다. 끝도 없이 바닥으로 말려 들어가는데도 발이 닿지 않았다. 지금껏 물이 무섭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거대한 파도 앞에서 진심으로 두려웠다. 까불지 말아야지, 규칙을 지켜야지,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차라리 팔이 떨어지는 게 낫겠어.’

부지런히 패들링을 하면서도 통돌이가 무서워 속으로 ‘제발 오지 마라 파도야’를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내 바람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파도는 왔다. 그렇게 몇 번의 에스키모롤 끝에 라인업에 도착했다. 라인업은 감사하게도 평화로웠다.  

숨을 고르고 통돌이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니 그제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눈부셨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나. 인생까지 갈 것도 없다. 파도는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정말이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두 시간 내내 파도와 씨름하던 화이트 워시와 달리 라인업에서는 파도를 타는 시간보다 보드 위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이리저리 파도를 찾아다니지 않고, 내가 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저 기다린다. 내 몫의 파도가 오기를.


부지런히 눈으로 내 파도를 찾던 선생님이 “온다!” 소리를 쳤다. 그린 웨이브에서의 첫 라이딩. 정말이지 화이트 워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내가 파도를 타는 게 아니라 파도가 나를 태워 가는 기분. 그냥 나는 발만 붙이고 서 있으면 됐다. 파도에 맞서 땅에 발붙이고 서 있는 연습은 보드 위에 발붙이고 서서 끝까지 파도를 탈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함이었나 보다. 처음엔 겁이 났던 “(니 파도) 온다!” 소리가 어느 순간 설렘으로 바뀌었다. 아, 낚였다. 이것이 ‘물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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