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비와 맞바꾼 나만의 공간
매달 15일, 관리비 고지서가 문 앞에 꽂힙니다. 관리비를 입금하며, 오늘은 사무실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간판도 창문도 없는 4.5평짜리 공간.
이름서재의 사무실은 오래된 상가 모음집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이 꼭 필요할까?'라는 질문에 '굳이?'라고 답하던 저는, 지금 사무실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사무실에 대한 로망도,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이 어려 출퇴근을 포기한 마당에 다시 어딘가로 출퇴근을? 안 될 일이었죠. 아이 재우고 호다닥, 잠깐 영상 틀어주고 호다닥 할 일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러다 보니 일과 삶의 경계가 흐릿해졌습니다. 출근도 없고 퇴근도 없는 하루하루.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지만, 같이 있기만 한 것 같은 기분.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사무실을 하나 얻는 게 어때?"
저녁 먹다가 툭 던진 남편의 말을 덥석 물었습니다.
"그럴까."
처음엔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습니다. 좀 귀찮기도 했고요.
집에서 도보 5분, 첫째 유치원과 둘째 어린이집도 5분 거리에 있는 오래된 상가 구석에 자리를 얻었습니다. 100% 실용적인 선택이었어요.
인테리어랄 것도 없이 바닥만 새로 깔고 남편과 뚝딱뚝딱 고쳤습니다. 집에서 쓰던 책상과 의자, 컴퓨터와 책꽂이, 거실에 있던 6인용 테이블까지 그대로 옮겨왔어요. 전부 집에서 가져온 것들이라 새로울 것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새로웠습니다.
둘째 어린이집 적응 기간에 맞춰 사무실을 정비하고, 3월 한 달은 유모차 끌고 아기와 함께 출근했어요. 낮잠 자는 동안 책상 옆에 유모차 세워 두고 잠깐 일하고, 아기 깨면 상가 복도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오기를 반복했어요.
집에서 편히 있을 걸, 아기도 나도 이게 밖에서 무슨 고생인가 싶은 날도 있었지만, 규칙적인 출퇴근 리듬을 다시 익히는 시간이었습니다.
요즘의 루틴은 이렇습니다.
9시 5분, 집 앞에서 첫째 유치원 버스 태워 보내고, 걸어서 둘째 어린이집 등원시킨 뒤 출근하면 9시 15분. 커피를 내리고 컴퓨터를 켜서 BGM을 신중히 고릅니다. 선우정아의 <도망가자>가 자주 흘러나오고요.
4시 30분에 정리하고 퇴근. 둘째를 데리고 집 앞으로 가 첫째 유치원 버스를 기다립니다. 5시부터 6시까지 놀이터에서 놀고 귀가하는 매일.
가장 달라진 점은, 일을 사무실에 두고 온다는 것입니다. 집에 컴퓨터가 없거든요. 대안이 없으니 사무실에 있는 동안 최대한 집중해서 일하게 되더라고요.
또 하나, 일을 자꾸 만들게 돼요. 고정비가 아까워서라도 가만히 앉아 놀 수가 없더라고요. 나만의 공간이 생겼으니 여기서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게 됩니다.
며칠 전에는 큰맘 먹고 복합기를 들였습니다. A3까지 출력되는 중고 복합기. 덩치가 커서 설치하고 나니 안 그래도 작은 사무실이 더 작아졌어요. 미팅 자료를 출력하며 생각했습니다.
"아, 이제 진짜 되돌릴 수 없구나."
달랑 책 한 권 낸 출판사가 무슨 사무실이냐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고정비만큼 무서운 게 없잖아요. 매달 숨만 쉬어도 빠져나가는 돈. '고정'된 비용. 하지만 그건 매달 그만큼의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지속할 의지.
주말에는 사무실 한켠에 꽂아둘 꽃을 사러 꽃시장에 다녀왔습니다. 저만의 작은 공간을 잘 가꾸며 이곳에서 재미있는 일을 하나씩 만들어가 보려고요. 언젠가 초대할 날이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