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을 때도 줄 때도 어려운 돈 이야기
"얼마 정도 생각하시는지 고민해 보고 알려주세요."
이름서재는 요즘 다양한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잔뜩 해보자!'가 올해의 목표라, 편집도 하고 기획도 하고 디자인도 하고 그림도 그려요. 그 과정에서 돈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받을 때나 줄 때나 돈 이야기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편집 외주는 예전부터 해왔으니 어느 정도 기준이 있지만, 그 밖의 영역은 늘 새로운 협상입니다. 아 이대로 얘기해도 될까, 너무 많을까, 적을까 손에 땀을 쥐는 시간을 충분히 지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제 견적은요," 하고 말하는 날이 올까요.
오늘은 올해 제가 경험한(경험 중인) 견적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합니다. 답은 없지만 막막한 와중에 힌트가 될 수 있기를요!
1. 처음 하는 일엔 실험 비용이 필요하다
창작자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서는 '대략적인 견적'에 대해 문의하는 글이 자주 올라옵니다. 답변은 늘 비슷해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서요."
평균치라도 알고픈 사람의 마음도, 뾰족한 답을 달아주기 어려운 사람의 마음도 고루 이해가 됩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 정말 그렇거든요.
저의 경우에는, 처음 하는 일은 웬만하면 상대방의 예산에 맞춰서 진행합니다. 모든 처음에는 실험 비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당연히 '아 이 돈 받고(주고) 할 일이 아니었네?'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한번 해보면 기준이 생겨요.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얼마큼의 시간과 공력이 들고, 그걸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다'라는 대략적인 기준이요. 그걸 얻는 비용이 '실험 비용'인 것이지요.
이때 실험 비용이 제 몫을 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손해 보기 싫은 마음에 '받는 만큼만 해야지'라고 생각하면 이 일을 할 때 얼마까지 받을 수 있는지 가늠이 어려워요. 서로가 최대한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려고 노력하고, 분명한 기준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로 인해 '다음'을 도모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요.
2. 명분과 실리 둘 중 하나는 챙겨야 한다(아니면, 재미라도!)
실험 비용을 지불하고 기준이 생기면, 어떤 일을 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명분(이 일을 통해 나 혹은 이름서재가 성장할 수 있나)과 실리(확실한 보상이 있나)를 생각해요.
올초에 친한 기획자로부터 전자책 표지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예산이 적어 작업 비용은 일반 단행본 표지의 1/5이었지만, 재미있는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라 흥미로웠고, 전자책 표지 작업은 처음이라 해보기로 했어요.
한번 해보고 깨달은 점은, "1/5은 안 되겠다!"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책의 내용을 숙지하고 디자인하는 건 마찬가지인 데다가, pod 주문을 고려해 결국 표1부터 표4까지 작업을 동일하게 하게 되더라고요.
결과물은 만족스럽게 나와서, 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한 전자책 출판사 대표님께서 따로 연락을 주셨어요. 비슷한 가격에 여러 권을 맡아 진행해 줄 수 있는지요. 사실 고민했습니다. "받은 만큼만 하면 쉽고 꾸준한 용돈 벌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건 명분도 실리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결국 제가 생각하는 적절한 견적을 전달하고, 그 이하는 어렵겠다는 말을 건넸어요. 다음에 신경 써서 작업할 일이 있을 때 연락하겠다 하고 마무리되었지요. 당시에는 아깝기도 했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에 훨씬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맡게 되었거든요.
3. 협상은 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돈에 관한 협상이라고 하면 연봉 협상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아 '보증금 올리고 월세 깎아주세요'도 있었네요). 그나마도 '내규에 따름'을 그저 따랐던 경우를 제외하면 한두 번 정도 될까요. 그 한두 번 역시 '이 만큼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케이' 하고 심심하게 끝나곤 했고요.
뭐든 정하기 나름인 협업의 세계에서 협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걸 배우고 있습니다. 4월 즈음 아트북을 함께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름서재에서 출간하되, 제작비는 상대가 부담하고 인세를 나누는 방식이었어요. 아트북은 제작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매우 솔깃했지만, 이번에도 두 가지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 이 책이 이름서재의 방향성과 맞는가? (명분)
- 아트북은 제작비도 많이 들지만, 일도 많다. 출간 후 판매가 얼마나 될 것인가? (실리)
둘 다 애매했습니다. 하지만 아트북 제작에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분야라 거절 대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았어요. 상대가 원하는 명분과 실리는 무엇일까. 이 책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일반 대중을 타깃으로 단행본을 만들어 서점에서 판매하는 대신,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아카이빙북을 만들고 전시를 함께 기획해 전시장에서 판매하는 책으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어요. 이름서재가 아니라 작가의 이름으로 출간하고 저를 외주 기획편집자로 고용하시면 어떻겠냐고요. 그렇게 새로운 제안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어요. 다른 프로젝트에서 디자인 협업이 필요한 상황이 있었는데, 책정된 외주 예산이 굉장히 타이트했어요. 디자이너에게 솔직하게 예산 구조를 설명하고, 같이 할 수 있는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역할을 촘촘하게 쪼개서 같이 할 수 있는 부분, 각자 맡을 부분을 나눠서 진행하는 방식을 먼저 제안해 주셔서 그렇게 작업해보고 있어요.
이런 저런 과정을 겪으며, 다른 건 몰라도 꼭 염두에 둘 세 가지 원칙을 정했습니다.
- 스스로 가치를 깎지 말자. 나는 받은 돈 이상의 결과를 내는 사람!
- 깊이 고민하되, 혼자 결정하지 말고 일단 이야기를 나누자. 최대한 솔직하게.
- 한번 일하고 나면 다음에 또 하고 싶은 사람이 되자. 결국 사람이 재산이다.
이렇게 적긴 했지만 여전히 돈 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많이 일 벌이고 부딪혀 볼게요. “제 견적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