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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Jul 27. 2022

아빠는 내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디어 마이 파킨슨 씨 01

사람이 몰려들 때면, 상주라는 게 마치 직업인 것처럼 느껴진다. 장례지도사라는 선임의 가르침에 따라 그저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절을 하라면 절을 하고, 무릎을 꿇으라면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라면 술을 따르고, 일어서라면 다시 일어선다. 사람들은 밀려 들어오고, 누군지도 모르지만 우선 악수를 하고, 절을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빠의 영정을 보자마자 자지러지게 우는 사람들을 볼 때면 어떨 땐 나보다 그들이 더 슬픈 듯도 하다.


“상주님? 여기”


인사를 하다가 조금 숨 돌릴 때가 되면 서류와 펜을 든 사람들이 몰려와 내게 사인을 독촉한다. 살아서도 아빠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할지 고민해본 적이 없는데, 이제 와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곳에 누울지, 어디에 모실지 끊임없는 질문이 밀려 들어온다. 오동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도 모르는데, 남해포인지 안동포인지 손명주인지 알 수도 없는 옷을 정하라고 한다. 


“화장하실 거예요?”


분명히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하고 예측하고 단언했는데, 근데 이상하게 정한 게 하나도 없다. 그저 뇌는 멈춘 것 같은데 몸을 멈추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왼쪽 팔에 달린 완장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조문객이 밀물처럼 쏟아지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는데, 악수를 나눴던 사람이 몇 명인지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셀 수도 없었는데, 사람들은 자꾸 내게 그들을 숫자로 얘기하라고 한다. 포도는 몇 박스? 수육은? 홍어는? 몇 마리?, 밥과 국 20인분 씩 몇 통? 


그리고 빌어먹을 코로나.


“아 상주님, 50명 아시죠?  코로나 때문에. 이미 한번 신고가 들어와서 상주님이 50명 넘을 것 같으면 장례식장에 못 들어오시게 하셔야 해요.”


장례가 아니라 전쟁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새벽 3시가 다 됐을 때쯤이었다. 다행히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에는 장례식장도 비교적 한산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아빠의 영정을 마주 보고 앉았다.


“뭘 잘했다고 웃어?”


삐그시 웃고만 있는 영정 사진을 보니 좋은 말이 나가지 않는다. 자기가 떠나서 이 사달이 났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모르겠지. 모르니까 이렇게 훌렁 떠나버렸겠지.


“왜 나한텐 말 안 하고 갔어? 제식이 삼촌한테도 영옥 이모한테도, 뭐 나는 난생처음 본 사람한테도 말하고 갔다면서. 아니 나한텐 말 안 해도 적어도 엄마한텐 말하고 갔어야 되는 거 아니야?”


장례식장에 들어서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아, 이런 게 수도꼭지구나 싶을 정도로 줄줄. 이제껏 내가 흘렸던 눈물은 눈물방울 같은 똑 똑 떨어지는, 슬픔도 그렇게 뚝 뚝 떨어졌었구나, 싶었다. 이제 내가 갖게 되는 슬픔에는 그침이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아빠는 새벽 4시에 죽었다. 장례식장을 차린 건 새벽 5시쯤이었다. 아빠와 친했던 아저씨들은 30분도 안 돼 장례식장에 모여들었다. 아직 식당 이모들도 오지 않았는데, 아저씨들은 냉장고에서 잎새주부터 꺼내 빈소에서 가장 먼 곳에 앉아 잔을 채웠다. 


“오셨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 중 누구도 빈소 가까이에 오지 않아, 인사를 하러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석영아. 네가 고생이 많다.”


아빠와 형님 동생 하던 제식이 삼촌이 내 손을 꽉 잡으면서 말했다. 


“느그 아빠가야 안 그래도 나한테 인사를 하러 왔시야.”


갑작스러운 제식이 삼촌의 말에 나는 그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석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래 그 선거운동할 때처럼 그렇게 잘 차려입고 나타나서는, 형님 나 가요, 그러니 내가 놀래 안 놀래? 어딜 가냐 이놈아 이러니까 어딜 가는지 대답도 안 하고 다시 나 진짜 가요, 이러는데, 이게 꿈이 아니고 생시 같아서, 내가 어디 가냐 석기야! 이러면서 침대에서 팍 일어났는데, 이 놈이 진짜 가려고, 진짜 이렇게 가려고 나한테 인사를 온 거여.”


그 후에도 아빠가 돌아가시던 그 시간에 꿈에서 아빠를 만났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오메, 석영아. 어쩐다고 이렇게 빨리 가셨다냐. 어쩐지 어제 꿈에 느그 아부지가 병원 로비에 서가지고 있길래 내가 어디 가려고 여기 왔냐고 물어보니까, 위를 가리키는 거여. 그래서 나는 네 엄마 일하는 2층 가려고 왔구나, 이랬는데 그게 하늘나라였나보다. 오메 석영아. 느그들 아직 아무도 못 여의었는지 어쩐다고 이렇게 빨리 가셨어. 그래.”


엄마와 함께 일하는 민옥이 이모도, 아빠의 선거운동원이었던 경자 언니도, 심지어 아빠 지역구에 산다던 이름 모를 어떤 사람도 아빠가 자신의 꿈에 나타나 작별인사를 하고 갔다며, 내 손을 붙잡고 그 얘기를 꺼내놓았다. 


 처음엔 황당하다가,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당황스럽기도 하다가, 근데 그게 거짓말이면 그런 거짓말을 해서 뭐하나 싶다가, 마지막엔 가는 것도 참 아빠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못 걸었던 걸음을 몰아서 해치우듯, 이 사람 저 사람 꿈에 나타나 작별인사를 하다니. 꼭 가장 가까운 중요한 가족들은 쏙 빼놓고 말이다. 참 아빠다운 인사라고.


그러고서 삐그시 웃는 아빠의 영정사진을 마주하니 화가 귀에서부터 났다.  뭘 잘했다고 웃냐는 말 뒤로 인사는 우리한테 먼저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또 선거할 때처럼 다른 사람들 꿈에 다 돌아다니고 나서 두 바퀴 세 바퀴씩 돌고 나서 우리 꿈에 한참 나중에 나타날 거냐는 말을 꾹꾹 삼키면서, 바닥이 뚫어져라 울면서, 아빠 사진을 매섭게 쳐다보면서 그렇게. 


귀가 불타는 것 같다가, 

불이 옮겨 붙었다. 눈에 볼에 목에 그리고 속에.


사실 아빠가 왜 작별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인사하러 왔으면 바짓끄댕이 붙잡고 절대 안 보내줄 걸 알아서, 또 석션으로 호흡기 박박 긁어서 아빠 숨 못 쉬게 하는 가래 덩어리 떼내고, 아빠는 기절하고, 그러다 눈 뜨면 안도했다가, 담배 피우고 싶다고 하면 화낼 걸 알아서. 아마 아빠는 한참을 돌고 돌아 나중에 와야지, 그랬을 것 같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으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이승에 발 붙이고 있으라고 하면, 화장실도 혼자 못 가서 끙끙 대면서도, 담배 피울 때마다 온갖 구박 들으면서도, 석션이 목구멍에 붙어 불에 지지는 것처럼 아픈데 그걸 참으면서도, 아빠는 옆에 있었을 것 같다. 


'근데 아빠가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그랬어.'


다시 쳐다본 영정 사진에서 아빠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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