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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럴 수 있냐 물었다

by 조이


남편에게 전해 들은 말이 있었다. 딸을 데려다주던 길에 들었노라고. 딸이 내게는 따로 말하지 않았던 내용이라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넘기려 했지만 자꾸 뒤돌아 그 자리를 맴돌았다. 곱씹을수록 괘씸했다.



비바람이 불던 날, 같은 교습소에 다니는 친구들과 함께 하교하던 길, A의 엄마가 A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학교에서 교습소까지는 도보 10분 거리지만, 날이 궂으니 데리러 온 엄마의 차를 타는 김에 A가 자기 엄마 차에 태워줄 사람을 골라냈다. 그 자리엔 B와 C, D, 그리고 나의 딸 E가 있었다. A는 B와 C, D까지만 태워준다고 했고 E는 안된다고 했다. B는 E와 친한 친구였기에 E와 같이 가겠다 했고 다행히 E는 혼자 남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B가 없었다면 딸이 홀로 비바람을 맞고 갔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생각해 보니 그로부터 일주일 전쯤 비슷한 일이 있었다. B와 E는 주일 아침마다 만나서 교회학교에 같이 가는데, A가 B에게 연락해서 같이 가자 했다고. B는 E와도 같이 가자고 했으나 A가 싫다고 했다며 E에게 그대로 전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외출 준비 중이었던 E에게 그 내용을 전해 듣고 기분을 살피던 중 B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엄마가 그렇게 하면 안 된대." 라며. 남편과 나는 그 말에 빵 터졌다. 아직 배워가는 아이들이구나 하고. 남편과 내가 터뜨렸던 그 웃음은 안심의 폭죽이었다.


올해 초였다. A는 전에도 E를 상대로 제멋대로 군 적이 있었다. E를 배제하기 위해 놀이 규칙을 뽑기에서 투표로 바꾸고,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귓속말을 해서 투표 결과까지 조작했다. 그러니까 뽑기에선 이미 E가 당첨된 상태였는데 그것을 굳이 번복하고 종용한 결과 E가 밀려난 것이다. 게다가 하필 B와 E의 대결구도를 만든 상황. 그때 딸은 많이 울었고, 내가 생각해도 따돌리려는 의도가 짙었기에 작은 일이 아니라 판단했다. 결국 카톡을 썼다 지웠다 하며 A의 엄마를 통해 부탁했다. A의 엄마는 A에게 확인해 보겠다 한 뒤로 어떤 피드백을 주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런 일이 다시없기만 한다면.


이후 교회 학교에 가는 일은 단지 그 아이의 의사 표현이었고, B의 엄마가 현명하게 대처해 준 덕분에 잘 마무리되었지만 이번엔 그냥 넘겨지지가 않았다. 비바람이 불던 날이라서 그랬을까. 뒤늦게 전해 들은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얹어져서 그랬을까. 유난히 날이 궂던 그날 그 시각, 사무실에 있던 나는 당연히 걱정이 되었지만 우산을 챙겨준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퇴근 후 집에서 만난 아이에게 교습소에 잘 갔냐 물었을 때, 아이는 우산을 써도 옷이 젖어 조금 추웠노라 말해서 다음부턴 점퍼를 꼭 가져가라 당부한 게 다였는데.


마침 둘이서만 병원에 가는 길, 아이에게 물었다. 그날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뒤로는 마음이 어땠느냐고. 아이는 괜찮았다고 했다. 그 뒤로 A의 얼굴을 마주치는 건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괜찮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걔는 너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원망의 물음이 아니었다. 대놓고 배제당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향한 비호감을 당당히 드러내는 상황 속에서 '너는 어떻게 괜찮을 수 있었는지' 나는 의아하기만 했다. 내 물음에 딸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B가 있으니까. B가 있어서 괜찮았어."


나는 딸이 겪은 일에 어느새 감정이입하고 있었지만 정작 딸의 마음을 백 프로 이해하진 못했다. 자신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A의 마음에서 밀려난 일보다, A가 호위하는 친구들 무리에 끼지 못하는 것보다 딸아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자신에게 소중한 B의 마음을 받은 일이었다. 비바람을 맞으며 함께 걸어가 주었던.


딸아이는 A에 대한 서운함을 곱씹느라 B에 대한 고마움을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 살짝 코치해 주었지만, 좋은 생각이라며 흔쾌히 동의하는 걸 보니 역시 배워가는 아이구나 싶었다. 그렇더라도 이번에는 내가 딸에게 더 크게 배웠음을 인정한다. 딸아이는 적어도 나처럼 지난 일을 이틀이나 마음에 담아두고 꽁해있진 않았다. 오히려 딸에게 물어보길 잘했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네가 괜찮으면 엄마도 괜찮아.


그런데 살면서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B와 같았던 존재마저 사라지는 순간 또한 올 것이다.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기분.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기분. 부모마저 가족마저 힘이 되지 않고 짐이 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내가 겪었던 것처럼. 그때는 아이에게 뭐라 말해줄 수 있을까. 만약 아이가 괜찮지 않다면 나는 더 괜찮지 않을 텐데. 그때를 위해 이 순간을 기록해 본다.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괜찮았던 순간에 나를 괜찮게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누구였을까? 혹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없는 것 같은 삶의 한가운데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이 인생인 것 같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어. 인생의 보물 찾기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거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네게 무엇이 중요한지 알게 될 거야. 소중한 것을 발견하는 힘은 그런 순간에 생겨나거든. 그리고 너는, 영원한 나의 보물이란다."


*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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