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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Oct 23. 2021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그게 불가능에 가깝더라도

  2019. 1. 15.


  가끔 하는 농담을 제외하고는 살면서 죽음을 다짐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건강했고 자주 웃었으며 매사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이루고픈 꿈을 이루기 위해 하는 나의 노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하기도 했고 매 끼니를 혼자서도 잘 챙겨 먹던 사람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다고 할 수 있는 당신과의 사랑이 끝이 나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했던 건 부엌 찬장을 뒤지는 거였다. 당시에 나는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식도락을 즐기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라서, 달에 한 번씩 본가에서 가져오는 쌀로 밥을 짓고 김치나 콩자반이나 김 같은 간단한 반찬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때문인지 요리를 가끔 하려고 마트에서 사두었던 식도는 좀처럼 꺼낼 일이 없었다. 플라스틱 포장재도 뜯지 않은 채로 부엌 찬장에 넣어두었는데, 그날 밤에 나는 찬장 안에 든 잡다한 주방용품들을 꺼내 내팽개치며 식도를 꺼냈고 망설이지 않고 왼쪽 손목을 그었다. 붉게 그어지는 선 위로 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다가 곧 피가 줄기차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목재 타일이 깔린 방바닥이 빨갛게 적셔지는 동안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고 있었고 머릿속엔 오로지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정신없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던 건 한 통의 전화였다. 비염이 심하니까 액티피드 한 알 정도 먹고 자라고, 아버지에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 나는 단지 열심히 울면서 실패한 사랑의 모습들을 하나씩 그려보고 있었다. 당연히 부모님은 주무시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았을 땐 놀랐다. 평소에 연락도 잘 하지 않으시는 아버지였다. 자식에게 안부 좀 전하라고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전화를 하셨을까. 이유가 뭐가 됐든 나는 피 묻은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받았다. 어쩐 일이세요. 엄마가 너 살았는지 죽었는지 좀 물어보고 그러란다. 저 잘 살아있어요. 그래, 밥은? 벌써 12시가 넘었는걸요. 그.. 너 액티피드 있냐? 네, 있어요. 엄마가 너 그거 먹고 자래. 네, 감사합니다.. 통화가 끝나고 나서 나는 내가 하고 있었던 일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불과 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통화였지만 좀 전과는 다르게 마음이 차분하게 식은 것 같기도 했다. 손목의 상처는 깊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피가 굳어서 그런 건지 흘러내리는 줄기가 가느다랗게 변해 있었다. 나는 화장실 선반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왔다. 그리고 손바닥에 피가 잘 통하지 않는 느낌이 들만큼 손목을 묶은 다음 파란 행주를 물에 적셔 바닥에 쏟은 피를 닦았다. 피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비릿한 냄새는 더욱 지워지지 않았다. 세면대에서 행주를 빨고 다시 바닥을 닦는 걸 여러 번 거듭하고 나서야 자국이 지워지는 듯했다. 홈웨어로 입고 있던 검은색 반팔 티셔츠와 수면바지는 벗어서 세탁기에 넣었다. 잘 입지 않는 다른 여벌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아이스 블라스트 한 갑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바깥은 달 하나 없이 어두웠다. 나는 넝쿨식물이 썩은 채로 내버려 두어져 있는 돌담 앞에 서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슬펐다. 다른 말로 표현할 방법도 없고 다른 말로 표현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아이스 블라스트는 당신이 나에게 처음 가르쳐준 담배였다. 나는 핸드폰 메모장을 켜고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그러나 결과적으로 속으로 삼켜야 했던 말들을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온아.


  행복은 불행한 곳에서 더 잘 보인다는데.


  그러면 있잖아, 행복한 곳에서도 불행이 잘 보일까?


  네가 행복해지길 바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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