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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Oct 24. 2021

다리

슬퍼하는 몸

  2019. 2. 21.


  친구에게


  오늘 밤에는 커튼을 치고 불을 끄고 영화를 한 편 봤어. 세상이 종말하기 전 다시 봐야 하는 영화 베스트 파이브 안에 드는 영화야. 너도 본 적 있을 거야. 이누도 잇신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라서 자주 다시 보곤 했는데 이미 전체 스토리를 알고 있어도, 앞으로 저 배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꺼낼지 미리 알고 있어도 나는 더욱더 몰입해서 영화를 보게 돼. 얼른 그 대사를 해주길 기다리는 걸까? 모르겠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너도 알 거라고 생각해. 알잖아, 느낌.


  내가 영화를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알아주는 영화광이잖아. 물론 취향 차이는 있겠지만 시중에 나오는 영화는 대부분 알고 있거나 봤다고 자부해. 대학가 후문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DVD방에서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 보던 겨울 기억하지. 헤이트풀 8이었나. 담배 한 손에 들고 거의 눕다시피 벽에 기대서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스크린만 찢어져라 쳐다봤잖아. 이렇게 보면 너도 참 영화죽돌이다. 그 저녁에 귀찮게 굳이 나와서 노트북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영화 한 편 보고 갔던 게.


  말로는 구질구질한 영화라고 하지만 명작이라고 인정하는 거 알고 있어. 나랑 같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봤던 사람들 대부분 따분하다고 졸고 그랬으니 네 말이 반은 맞는 셈이네. 영화가 참 정적이잖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아무튼 말이야, 내가 정말 아끼는 장면이 몇 개 있는데 말이지....... 이를테면 츠네오가 조제에게 이제 휠체어를 사는 게 어떻겠냐고 했을 때 조제가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더욱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 같은 거. 나는 그런 게 너무 슬프다. 보이지 않는 슬픔을 사랑하면서도 막상 그게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에는 나를 종이처럼 구겨서 라이터로 불을 붙여버리고 싶어. 보이지 않는 슬픔이라고 하니까 신승훈 노래가 생각난다야. 우리 전에 같이 기차역에 갔었잖아. 어디로 여행가고 싶은 기분인데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아서 그냥 가장 빠른 시간에 있는 표를 사자고. 그게 백양사였지. 운이 좋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백양사는 우리 스타일대로 사람이 적고 허허로운 곳이었어. 하릴없이 돌아다니다 발견한 카페는 내 생애 첫 LP카페였고 주인아저씨는 러프한 말투에 대비되는 유려한 몸동작을 가진 매력적인 분이셨지. 기억나지? 그 밤 거기에서 들었던 오래된 노래들. 신승훈과 장현철과 심수봉, 구창모, 변진섭 그리고 최백호를.


  너는 몰랐겠지만, 알아도 말 안 했겠지만 바다 끝을 듣고 나왔을 때 노래가 너무 아름다워서 카페 벽에 기대 서서 조금 울었다. 잠깐이지만, 이곳은 사랑하는 사람과 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었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꼭 같이 보고 싶은 영화였어. 결국 같이 본 적은 없었지만, 나 혼자 봐도 충분히 아름답고 슬프고 희망적인 영화인 것 같아. 조제와 헤어진 츠네오가 카나에 옆에 주저앉아서 우는 장면이 있어. 이별의 원인이 사실 단 하나라고, 단지 자신이 도망친 것뿐이라고 독백하면서 오열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말이야, 나중에 실제로 츠네오를 연기한 배우가 감정이 북받쳐서 울었다는 글을 읽고 놀라기도 했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우리는 츠네오를 욕할 수 있을까. 나는 츠네오가 조제를 버린 거라고 단순하게 마침표를 찍고 츠네오를 나쁘게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이 밥 한 끼라도 절대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 사랑이 의도를 가지고 피어날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떠나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나는 종종 츠네오가 조제처럼 다리를 잃는 상상을 하곤 해.

  그러면 조제는 이해받을 수 있었을 텐데.

  츠네오는 단지 사랑을 실패했을 뿐이고 조제는 진심을 다하는 사랑에 성공한 게 아닐까?

  그래서 츠네오가 울었던 게 아닐까.


  이 영화를 볼 때면 나는 기분이 좋아져.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구나,

  어쩌면 사랑에 성공했구나 하고 확신할 수 있어서.


  오늘도 어김없이 조제의 힘없는 두 다리를 사랑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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