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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Oct 24. 2021

헤어 드라이기

거울 앞에서 아침을

  2019. 3. 2.


  그루밍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게 가꾸는 것과 관련 있는 신조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오히려 햄스터나 아기 토끼 같은 작고 귀여운 동물의 종 이름인 줄 알았다. 그루밍 grooming의 groom이 마부를 뜻한다는 걸 알고 얼마나 황당했는지. 처음엔 머릿속에서 매칭이 잘 되지 않았지만 차츰 익숙해져 가기 시작했다. 마부가 자신의 말을 빗질하고 목욕시키면서 말끔하게 꾸며주는 것처럼, 나도 내 모습을 가꾸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평소에 세수와 면도를 하고 스킨 제품을 바르고 샴푸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는 게 전부였고, 보편적인 한국 남성들이 많이 했던 헤어 스타일을 하고 다녔다. 옆머리는 소프트 투블럭으로 9~10mm 정도 다듬고 뒷머리를 상고로 높게 치고 앞머리는 가르마 없이 눈썹까지 뚝 떨어지는 바가지 머리.


  나를 가꾸기로 마음먹고 나서 며칠 동안은 적응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제는 빠르고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나의 아침 미용 루틴이 완성되었다. 크게 달라진 건 많이 없지만 약간의 구체적인 터치와 새로운 과정이 추가되었다.


  기상 - 미온수로 세수 - 면도 - 온수로 세수 - 샤워 - 샴푸로 머리 감기 - 린스나 컬링 오일로 한번 더 감기 - 수건으로 머리 닦아주기 - 냉수로 세수 - 스킨 오일과 수분크림, 브라이트닝 영양 크림 바르기 - 드라이기로 머리에 수분이 조금 남아있을 만큼만 말려주기 - 머리에 헤어 에센스 소량 구석구석 발라주기 - 고데기와 드라이기로 가르마를 만들고 앞머리 기장을 눈썹 가릴 정도로 올려준 뒤 컬을 넣기 - 드라이기로 옆머리 눌러주고 뒷머리에 볼륨 만들기


  장발을 하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짧은 머리가 나에게 어울리는 머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서부턴 항상 머리카락이 콧등에 닿을 만큼 길렀고 고데기와 헤어 드라이기로 모양을 내야 했기 때문에 부지런해야 했다. 전처럼 무기력과 우울에 빠져 침대에 누워있기만 해서는 내가 원하는 시간의 양을 지킬 수가 없었다. 원하는 시간의 양을 지키지 못하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보내고 싶은 하루를 구상할 시간도 없이 타인보다 부족한 하루를 보내야 한다. 타인보다 부족한 하루를 보낸다는 건 오후 4시쯤 일어나 이불 안에서 달팽이처럼 몸을 말고 있다 대충 배달음식이나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넷플릭스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그나마 쥐고 있는 시간마저 나에게 아무런 의미 없이 버려버리고, 자정이 훨씬 지난 새벽이 되어서야 기어가듯 침대 위로 올라가 잠을 청하는 걸 의미한다. 하루 이틀 가끔 그런 날을 보내는 건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유통기한 지워진 통조림 캔처럼 아무렇게나 방치되는 건 다른 의미로 보아야 했다. 더구나 사랑했던 사람에게 버려지고 난 이후에는 그렇게 허공으로 사라지는 시간들이 내게 치명적인 독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이렇게 흘려보내는 시간도 조금씩 줄어들겠지 라는 생각은 나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시간을 약으로 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일찍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바쁘게 시간을 나누어야 했다. 최소한의 내가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만큼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 그러기 위해서 매일 아침마다 나는 젖은 머리 위로 헤어 드라이기를 가져다 댔다. 나를 가꾸는 그 짧은 시간은 나를 치유해가는 시간이었다. 잘 정돈된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면서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자주 웃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헤어 드라이기를 사랑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헤어 드라이기는 나에게 소중한 물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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