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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Oct 24. 2021

부처

시간을 약으로 쓰기 말도록

  2019. 2. 17.


  나는 구시청 주점이 늘어서 있는 사거리에서 대학 동기 몇몇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디야? 동기는 동경야시장으로 오라고 했다. 저녁 아홉 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고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건지 기온이 좀 높은 건지 춥지는 않았다. 나를 집에서 도보로 40분 남짓 걸리는 이곳까지 끌어낸 건 술이나 한잔 하자는 동기의 연락이었다. 내가 이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동기 하나가 사람을 모아서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1층은 자리가 이미 만석이었고 동기가 보내는 사진과 영상을 톡으로 확인하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어쩌다 헤어지게 된 건데."


  그게 있잖아. 인스타 피드를 구경하다가 디엠을 주고받으면서 알게 된 사람이었는데. 우리처럼 문학을 배우는 학생이었는데 말이야....... 정신과 원장님께는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제멋대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당신과 내가 디엠으로 처음 나눴던 책이 장강명의 소설이었다는 것과 우리는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로 사랑에 빠졌었다는 사실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나에게 드라이플라워를 선물했다는 것과 당신은 시를 쓰고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으며 우리가 함께 처음 지새운 밤은 시처럼 유연하고 무한하게 흘렀었음을, 당신의 연말 행사 시 낭독을 듣기 위해 갔다가 우연히 내가 듣는 수업의 교수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하였고,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당신은 폴리아모리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도..


  동기가 타주는 소주와 맥주의 비율은 지난한 연애사를 속에서 들어내는 일만큼 끔찍했다. 나는 한 컵 가득 담긴 투명한 액체를 목에 쏟아 넣으며 빈 눈으로 천장에 달린 풍등을 보았다. 뭐라고 한자가 적혀 있었지만 나는 읽을 줄 몰랐고, 그저 당신과 사랑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나였으면 바로 욕 박고 헤어졌다. 야, 너 부처네. 부처."


  직원이 가져다준 타다키를 젓가락으로 집어먹으며 동기 하나가 대뜸 말을 뱉었다. 쉬지 않고 삼킨 술 때문인지 조금은 불쾌해진 기분 때문인지 내 얼굴은 화끈 달아올라 있었고 내 옆에서 친구는 말없이 내 표정을 읽고 있었다. 동기 몇몇은 '부처'라는 말이 꽤나 감명 있었던 건지 '부처도 한잔 해야지!'라며 나의 빈 잔에 자꾸만 청하를 따라주었다. 그런 년은 잊고 새 사람 찾아야지. 넌 멘탈이 좋으니까 할 수 있을 거야. 동기가 내 술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학 동기로써 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 같은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래! 다 잊고 술이나 쳐마시자! 인생 별 거 있냐? 다른 사람 만나면 되지.'라고 응수해야 했을까. 아쉽겠지만 나에게 사랑은 낡은 부품을 새 부품으로 갈아 끼우는 행위가 아니었다.


  빈자리에 바쁘게 새 사람을 앉히는 건 내게 사랑이 아니다. 하늘색이 다 같은 하늘색이 아닌 것처럼 사랑이라고 다 같은 사랑은 아닐 거다. 나에 대해서, 나와 그 사람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다고 이리 함부로 얘길 하는 거지?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고 동기들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물려는데 조용히 따라 나온 친구가 내 입에 말보로 골드를 물려주었다. 내 손에서 빼앗아간 아이스 블라스트를 문 친구는 불을 당겼다.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다 잊혀지지는 않아. 전부 괜찮아지지는 않더라.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식고 있었다. 찬 밤의 공기가 담배 연기와 섞이는 사이 나는 멘탈이 좋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어디까지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건지....... 어째서 멘탈 좋다는 말은 상황에 따른 내 반응만 놓고 얘기를 하는 건지.


  그때의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견뎌야 하는 일도 아니었는데.


  사람마다 다 다른 거겠지. 친구는 내 마음을 투시라도 한 듯 말했다. 시간을 약으로 쓰지 말자. 친구는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래. 시간을 약으로 쓰지 않기로 하자.


  그 말이 밤새 나의 마음을 감싸 안아주었단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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