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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Oct 24. 2021

3인분 같던 1인분

하루 세 끼 챙기기

  2019. 2. 13.


  그동안 하루에 한 끼를 먹거나 너무 불규칙적으로 식사를 해서 체중이 급속도로 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하루 세 끼를 먹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귀찮고 무기력해도. 나를 건강하게 돌보는 일의 시작은 분명 잘 먹는 거라고 생각했다. 디저트 같은 건 생각도 안 하더라도 아침 점심 저녁 때 맞춰서 밥을 차리고 꼭 꼭 씹어 넘기는 거. 도저히 식사를 차릴 기운이 없으면 배달음식이라도 시켜서 먹어야 했다. 이별한 후로 줄곧 집안에만 있었으므로 오늘은 좀 외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돌이도 아닌데 집에만 있는 거 그거 위험신호 같은 거라니까. 아침은 간단하게 넘기기로 했다. 먹고 남은 토스트 몇 장에 달걀을 입히고 설탕을 조금 뿌려서 구웠다. 맥심 커피랑 같이 먹으면서 핸드폰으로 인스타그램을 둘러봤다. 요즘은 이런 분위기의 카페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네. 경포대 좋지. 밤에 별도 많이 뜨고. 버켄스탁 신상이 나왔구나. 그러다가 발견한 도서 리뷰에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구절이 있었다.


  "모든 형태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밑바닥부터 삶을 사랑할 필요가 있었다."


                                                                                                                      -마음의 파수꾼 中


  나는 우연히 발견한 이 글귀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반복해서 읽다가.. '삶'이라는 단어 대신 '나'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모든 형태의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밑바닥부터 나를 사랑할 필요가 있다고. 누구에게나 살면서 빛나는 순간들은 있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나, 빛나는 순간들만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빛나는 순간만을 사랑하는 것은 과거를 살아가는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는 일은 미래를 살게 해준다. 너무 오랫동안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슬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사랑받았던 다정한 시간들을 너무나도 오래 붙들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옷장을 열었다. 비어 있는 옷걸이가 많았다. 나는 곱게 개어 놓은 검은색 니트와 데님 팬츠를 꺼내 입고 지하상가에서 싼값에 건졌던 회색 머플러를 목에 감았다. 밖으로 나오자 서늘하지만 시원한 공기와 투명한 햇빛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였다. 오늘은 무엇을 해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다는 이유 없는 예감이 들었다. 이미 햇빛만으로도 충분했던 걸까. 내 안의 무언가가 환기된 느낌이었다.


  오늘은 막상 이것저것 다양하게 하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정말 괜찮았다. 항우울제를 먹는 일은 몹시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었지만(이것을 먹고 나면 속이 울렁거렸고 쉽게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내 무기력함이 한 줌 덜어진 기분이었다. 하루 세 끼를 꼬박 챙겨 먹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늘 아침의 토스트와 점심의 낙지 덮밥과 저녁의 라멘을 사랑해. 기본적으로 나의 하루를 챙겨준 것은 그것들이었다.

  애정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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