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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 도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수영+카페호핑+마사지+재즈바 = 흔한 치앙마이 여행자의 일상

by 안긁복의 모두극뽁 Feb 21. 2025

밤새 뒤척이고 울다 잠들어 (이유는 전편에서 확인) 퉁퉁 부은 눈으로 기상했다. 오늘부터는 진짜 혼자 이 도시에서 살아본다. 지난밤, 남편이 떠난 뒤 갑자기 겁이 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나도 뒤따라 한국으로 갈까 생각도 했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제 남편에게 울며 남긴 영상편지를 다시 보니 봐주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결연한 의지를 다졌던 것 같다.


이것마저 해보지 않고 포기하면 나는 이 연쇄적인 무력감을 끊을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해보고 싶었던 거니까, 놀고 쉬고 먹는 여행이니까 외롭고 두렵지만 해내볼래!

혼자 살기 DAY 1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오늘 아침은 설레고 기운이 난다. 아무래도 이 레지던스 덕분인 것 같다. 얼른 루프탑 수영장으로 올라가 모닝수영을 해보고 싶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17층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우기인지라 날이 흐리지만 수영하기엔 오히려 더 좋은 듯하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도 많이 없고 딱이다. 경치도 구경하고, 수영도 하고, 선베드에 누워 책도 읽자면 시간이 없다.


지금 머무는 곳은 치앙마이의 구시가지이다. 올드타운을 기준으로 남동쪽이자 나이트 바자와 삥강(Ping River)이 있는 곳으로, 최근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님만해민 지역에 비하면 확실히 조금 오래된 건물이 많고 낙후되어 있는 인상을 준다. 그렇지만 삥강을 따라 고즈넉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어, 치앙마이에서 가장 화려하고 비싼 리조트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머무는 레지던스 루프탑에서는 360도로 치앙마이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기 때문이다. 도이수텝이라는 치앙마이에서 가장 유명한 사원이 있는 수텝산이 멀리 보이고 삥강 줄기도 내려다 보인다. 해가 뜨는 곳에서 시작해서 해가 기울어 저무는 곳까지 볼 수 있고 종종 비행기도 날아다녀 그냥 올라가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곳이다. 어쨌거나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집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모닝, 거기에다가 공복 수영을 했다. 고작 하루했지만 벌써 건강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수텝산과 치앙마이 시티, 삥강이 내려다보이는 수영장

구경도 하고, 수영도 하고, 쉬기도 하고, 책도 읽었다. 내일도 모레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욕심내지 않고 책은 몇 장만 읽었다(절대로 집중을 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오전 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아기들을 데려 온 가족도 있었고 나처럼 혼자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다. 동양인들에 비해 서양인들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고, 한국인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딱히 방해받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수영장 자체의 길이가 160M(높이가 아닌 길이이다)나 되다 보니 혼잡하지 않고 private space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한적한 수영장에서 수영과 일광욕, 그리고 책 읽기

수영을 마치고 사우나에서 물기를 말리고 내 방으로 내려왔다. 씻고 브런치를 먹으러 나갈 것이다. 레지던스 바로 앞에 유명 브런치 맛집이 있는 건 알았지만 언제든 갈 수 있으니 조금 멀리 나서보기로 했다.

수영 끝나고 물기를 말리기 좋던 사우나


미떼미떼라는 브런치카페로 정했다. 나무가 사방을 둘러싸 자연 속에 있는 곳 같으면서도 가정집 같은 분위기라는 설명에 끌렸다. 귀여운 아기 고양이가 반겨주는 입구를 지나 들어서니 유럽풍의 인테리어가 반전미를 더해 더욱 기대감을 주었다. 나무 창살이 있는 창가 앞에 자리를 잡고 신중하게 메뉴를 골랐다. 홀로 온 여행객이 한참을 고민하자 점원이 다가와 메뉴를 몇 가지 추천해 주었다. 잠시 스몰톡이 이어져 본인은 유학을 다녀왔으며 고향집을 개조해 이 카페를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쩐지 유럽감성이 느껴진다 했어

사장님이 어릴 적 살던 이층집을 개조한 카페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카페를 둘러보았다. 나처럼 혼자 온 손님들도 꽤 보였다. 아무래도 메뉴가 서양식이다 보니 나를 제외한 손님들은 모두 서양인들로 보였는데, 노트북 한 대를 두고 브런치를 즐기며 작업하는 모습은 내가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디지털 노마드의 모습이었다. 2층으로 올라갔더니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통창으로 바깥의 녹음을 그대로 안으로 끌어들여왔다고 하면 맞을 것 같다.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며 커피 한 잔 하는 모습에서 또 한 번 여유를 느껴본다.

또 다른 분위기의 2층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사워도우 빵 위에 오믈렛과 엄청나게 두툼한 베이컨을 올린 요리였다. 아마도 한국사람이 보면 백이면 백 이 베이컨은 아주 익숙할 텐데, 오겹살구이라고 보면 된다. 태국에서 주문한 서양식 요리에서 한국 음식의 맛을 느끼는 그런 특별한 브런치였다. 디저트로는 과일이 들어간 요거트를 시켰는데 너무 예뻐서 한 번, 너무 본격적이어서 또 한 번 놀랐다. 브런치니까 아침+점심 합친 것만큼 먹어도 되겠지? 게다가 수영도 했으니까. 그러니 2차로 카페를 하나 정도 더 가도 될 것 같다.

오겹살처럼 두툼한 베이컨과 본격적인 디저트

나보다 먼저 2주살이를 했던 후배가 ‘요즘 치앙마이 MZ들은 다 간다’며 추천한 카페로 2차를 갔다. 삥강 근처에 테이블을 놓고 커피를 마실 수 있으며 커피 맛도 수준급이라고 했다. 이전에 갔던 곳과는 달리, 확연히 현지 청년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돌로 지어진 아치형 건물 내부와 야외 모두를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나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 삥강은 치앙마이의 젖줄이지만 황토색 흙탕물은 볼 때마다 적응이 힘들다. 그리고 수위가 꽤나 높아서, 아이들을 데려온 손님들은 강 주변으로 아이들이 가지 못하게 조심했다. 이땐 몰랐다, 왜 수위가 이렇게 높았는가를..

삥강 주변, 치앙마이 MZ들이 찾는다는 카페

찐하고 고소한 우유맛이 느껴지는 라떼를 한 잔 하니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택시를 불러 마사지샵으로 이동했다. 오픈 카카오톡에서 ‘치앙마이 여행자방’을 찾아 들어갔더니 여러 정보가 있었는데 그중에 한 분이 치앙마이에 거주하시면서 마사지샵을 운영하신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친근감을 느끼고 찾아가 봤다. 사장님이 진짜 왔느냐며 무척 반겨주셨다. 마사지를 받고 나니 깜깜해졌는데 혼자는 위험하다며 근처 관광지인 ‘크렁 메 카’도 함께 걸으며 소개해주시고 사진도 찍어주셨다. 혼자 지낸다니 마음이 쓰인다며 아침 시장에서 샀다는 용과와 망고까지 비닐에 한가득 담아주셨다. 사실 마사지만 놓고 본다면 더 솜씨가 뛰어난 곳들이 많았지만 받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고 비닐봉지를 들고 문을 나서면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사지샵 인근의 크렁메카(치앙마이의 청계천)

숙소에 돌아와 잠깐 쉬면서 과일을 먹는데 오픈 카톡방에 모임 번개가 올라왔다. 치앙마이에 여행 온다면 꼭 봐야 할 쇼라는 ‘램쇼(The Ram Show)’에 함께 갈 여자 동행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태국은 트랜스젠더 쇼로 유명한데, 램쇼바 역시 트랜스젠더들이 공연을 하는 바였다. 입장료는 따로 없고 맥주만 마셔도 되고 공연의 퀄리티가 꽤 높다고 들었다. 쇼는 보고 싶긴 한데, 마사지받고 와서 샤워까지 하고 노곤노곤 하던 차였다. 그런데 왠지 이 기회를 잡아야 할 것 같았다. 혼자서는 절대 갈 수 없을 것 같고 이런 모임이 또 생길지 아닐지 모르는 일 아닌가. 냉큼 가겠다고 답장을 하고 옷만 갈아입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는데 다섯 명의 여성들 모두 혼자 치앙마이에 여행을 왔다고 한다. 새삼 한국 사람들이 치앙마이에 여행을(그것도 혼자) 많이 오긴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이름, 나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우리는 인사만 나눈 채 쇼가 시작되었다. 재미, 퍼포먼스, 쇼맨십, 퀄리티 모두 갖춘 공연에 우리는 처음 보는 사이지만 마주 보며 웃고, 하이파이브를 하다가 끝내는 어깨동무도 했다. 무대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언니들(?)이 손키스라도 날려주면 다 같이 소리를 지르며 화답했다.

화려하고 다양한 레퍼토리의 공연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이지만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다니. 옆 테이블에 앉은 태국인 형제와도 친해졌다. 그들이 내게 춤을 잘 추는 것 같다고 자기들도 한 춤 한다(?)며 춤을 추다가 인사도 나눴다. 그들이 형제이며 치앙마이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는 스몰톡까지 이어졌다. 이제 내가 태국에서 히스토리를 아는 사람은 네 명이 되었다. 올드타운에 있는 카페 ‘now here coffee’의 사장님, 브런치카페 ’ 미떼미떼‘의 사장님, 오늘 만난 춤꾼 형제 둘.


쇼가 끝나고 우리는 쿨하게 헤어졌다. 카톡방에서 만난 분들과도 닉네임만 공유한 채 오다가다 길에서 또 만나자는 인사를 끝으로 서로의 숙소로 향했다. 신나는 쇼의 여운도, 살짝 남은 맥주의 기운도, 무엇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의 동행 경험도 좋았다.


혼자서도 알차게 보낸 하루가 지나갔다.


혼자 살기 Day 2


오늘도 수영장에 갈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오늘은 피트니스에서 가볍게 준비운동도 했다. 탁 트인 뷰에서 운동을 하니 왠지 매일 하고 싶어질 것 같다. 1박에 3만 원 후반대로 이 모든 걸 누릴 수 있다니. 한국에서라면 정말 상상도 못 할 금액이다. 사이클을 타고 수영도 한 바퀴 돌고 내려왔다.

절로 운동이 하고 싶어지는 view

아점을 먹으러 가야지 하며, 채팅방을 보니 이번엔 점심 번개가 올라와 있었다. 어제 공연을 함께 봤던 갱지님이 올린 번개였다. 반갑기도 했고 혼자 밥을 먹으려던 참이어서 얼른 손을 들고 참여했다. 만남 장소는 올드타운이었고 약속 시간까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가보고 싶던 과일주스가게를 가보기로 했다. ‘쿤캐 주스바’라는 유명한 스무디 가게인데 신선한 채소와 열대과일로 스무디와 볼을 만드는 곳이었다. 설탕을 쓰지 않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만 원이 훌쩍 넘는 아사이볼을 4,000원 정도면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아사이볼을 먹으러 가봤다. 외관부터 온갖 과일들이 쌓여있어 누가 봐도 여기는 과일주스 가게였다. 메뉴판에는 온갖 과일과 채소 조합의 스무디들이 있었고 자신만의 레시피로 과일을 마음대로 조합해서 볼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었다. 나는 아사이볼을 주문했다. 스무디 위에 올라간 실한 과일 토핑을 하나하나 맛보면서 선선한 바람을 느꼈다. 왜 인기 있는 곳인지 알겠다. 이후로 웨이팅이 길어져 나는 얼른 먹고 일어섰다.

신선함 그 자체였던 쿤캐 쥬스바

점심 동행들과는 ‘아로이 디’라는 음식점에 갔다. 혼자 가면 메뉴 하나만 시켜 먹었을 텐데 여럿이 가니 다양한 메뉴들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다행히 오늘 모인 사람 모두가 태국 음식과 향신료에 대해 모두 ‘호’인 사람들이었다.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하나씩 골라 셰어 하기로 했다. 무난한 팟타이 외에도 그린 커리, 똠양꿍, 뿌빳 퐁 커리(게가 들어가는 커리요리), 카오쏘이(태국 북부에서 먹는 커리누들) 등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메뉴들도 모두 통과되었다. 모든 메뉴들이 다 기본 이상으로 맛있었다. 모두가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

함께였기에 다양하게 즐긴 점심

식사 후 커피는 국룰이죠. 자연스럽게 카페로 다 같이 이동했다. ‘아카 아마’라는 태국 북부의 고산족(아카족) 청년이 공동체를 위해 만든 사회적 기업이자 치앙마이 3대 커피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는 카페로 갔다. 복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운데 오픈키친이 크게 자리한 인테리어가 트렌디했다. 정말 치앙마이 웬만한 카페들은 모두 트렌디하고 공간이 멋지다.

올드타운에 위치한 아카아마 왓프라싱 점

우리는 네 명 모두 치앙마이의 대표커피인 ‘더티커피’를 시켰는데 양이 적어서 놀랐다. 그리고 한입 맛보는 순간 달콤한 우유와 진한 커피 맛에 한번 더 놀랐다. 치앙마이에서 이야기하는 더티커피는 더러운 커피가 아닌 숙성우유나 연유를 쓰는 커피를 말한다. 그리고 각 카페마다 조금씩 맛이 다르다. 나는 여러 곳에서 먹어봤지만 가장 처음 맛봤던 터인지 아카 아마의 더티커피가 가장 맛있었다.

처음 맛본 더티커피

밥 먹을 때는 별말 없이 밥 먹는데 집중했지만 차를 마시면서는 각자의 이야기를 조금씩 곁들이게 되었다. 한국에서 각자 어떤 일들을 하는지 치앙마이에서 얼마나 머무르는지 등 이야기가 오고 갔다. 매년 가을-겨울에 치앙마이에서 6개월 정도 지낸다는 개발자, 이번에 처음 치앙마이에 4박 5일로 여행을 왔다는 마케터, 베트남과 태국을 오가며 장사를 한다는 사업가가 그들의 진짜 정체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모두 여행자일 뿐이다. 개발자 분이 치앙마이에서 먹어본 더티커피 중 가장 맛있었다며 보답으로 커피를 사주신다고 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은 가까워진 우리는 감사히 얻어마셨다.


일행과 헤어진 후 나는 또 마사지를 받았다. 남편과 함께 방문했을 때 아주 만족했던 샵에 다시 방문해 등과 어깨 위주로 마사지를 받았다. 오른쪽 어깨가 많이 안 좋다며 오른쪽 위주로 풀어준다고 했다. 진짜 정말 시원했다. MaLee라는 이름의 마사지사는 자신을 다시 찾아줘서 고맙다고 내가 만족해서 기쁘다고 했다. 다음번에도 또다시 그분께 받고 싶을 정도로 섬세하고 시원한 마사지였다.


마사지가 끝나고는 치앙마이의 아이돌이라는 ‘3D 밴드’의 공연이 열리는 재즈바에 갔다. 점심을 함께 한 갱지님이 또 다른 동행을 구해 꽤 많은 인원이 모였다. 이번에도 우리는 인사만 나누고 공연에 심취했다. 그들이 직접 만든 노래로 나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노래를 불렀지만 정말 신이 나고 끝내주는 무대였다. 왜 그들이 아이돌인지는 그들의 무대매너와 쇼맨십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매일 다른 재즈바에서 공연하는데 이들을 따라 매일 다른 재즈바로 공연을 보러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팬덤이 있으니 과연 아이돌이다. 보컬이 끝인사를 하며 ’ 우리는 다음 주에 한국 망원동에서 공연해 ‘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치앙마이에 여행온 한국사람들이 그들을 너무 좋아해서 그들을 초청했다고 한다.

치앙마이의 아이돌, 3D밴드의 공연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망원동에서 3D밴드가 공연한다고 해도 무심히 지나쳤을 텐데, 이제는 그들이 누군지 알고 그 공연을 보러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신기했다. “그 사람의 첫 장을 넘기지 않는다면 비밀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이병률 시인의 말처럼, 내가 오늘 용기 내어 찾아온 그들의 공연장에서 나는 이 밴드의 첫 장을 넘겼고, 그렇게 내게는 비밀의 문이 열렸다.


처음 듣게 된 노래를 흥얼거리며 숙소로 도착했다. 어제와 오늘 혼자만의 시간도 충분히 보냈고 동행을 구한 덕에 식사도 공연도 더 풍성하게 즐겼다. 1일 1 수영, 1일 2 카페, 1일 1 마사지, 1일 1 공연으로 알차게 채운 하루하루였다. 혼자일 때 누릴 수 있던 고요와 평화도,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했기에 배가 되었던 설렘과 즐거움도 모두 행복한 기억으로 저장될 것이다.

‘이 정도면 나 완전 혼자 여행 마스터 아니야? 한 달 살기 완전 쉽게 가능하지!’

앞으로 닥쳐올 시련을 모른 채, 성취감에 젖어 만족스럽게 잠이 들었다.


여행과 관계의 본질은 닮았다.
여행도 관계도 처음엔 새로운 걸 좋아하지만
나중엔 낯설지 않은 곳을 다시 찾게 된다.

어떤 장소나 어떤 사람과의 만남은
언제나 흥분과 탄성을 자아낸다.
그러다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감정의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으면
아늑하고 평화로워진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고 어딘가를 여행하는 이유는
내면의 고요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닐까.
언제나 그곳에 머물 필요도, 언제나 그 사람에게 소속될 이유도 없다.
그곳의 설렘과 그에 대한 떨림과 좋았던 기억을 잊지 않으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의 씨앗을 얻을 수 있다.

(림태주, 관계의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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