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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홀로서기

나와는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남편의 귀국

by 안긁복의 모두극뽁 Feb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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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치앙마이에 온 지 4일 차이다.

오늘은 호텔살이를 접고 저녁쯤에 오래 머물 레지던스로 이사 후, 남편을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날이다.

저 동쪽나라 견우직녀국에서 온 부부의 이별을 어찌 알았는지 아침부터 비가 그치지 않고 온다.


비 오는 날엔 국수지. 어묵국수로 유명한 곳에서 어묵국수와 돼지뼈찜을 시켜서 속을 뜨끈하게 데웠다.

어묵국수는 각종 어묵과 피쉬볼이 들어있는 쌀국수였고 돼지뼈찜은 우리나라 감자탕에 조금 시큼한 소스를 부어놓았다고 보면 된다.

역시나 한국인들에게 해장으로 유명한 이유가 있다.

따봉드립니다, 시아어묵국수

배를 뜨끈하게 채워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지만 꼭 가보고 싶었던 예술가 마을 ‘반캉왓’에 가보기로 했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아티스트들이 만든 공동체 마을이자 다양한 공방, 카페, 플리마켓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해서 여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꼭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주차장에서 택시를 내리자마자 보이는 ‘note a book’이라는 곳은 직접 종이와 실을 엮어 책과 노트를 만드는 북 바인딩 샵이다. 담쟁이넝쿨이 둘러싼 샵 입구는 사진을 찍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우리도 입구에 들어서려 했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모녀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두 분의 사진을 남겨드리겠다고 먼저 말씀드리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드렸다. 사진을 확인함과 동시에 번지는 미소, 성공이다. 어머니도 딸도 감사 인사를 연거푸 해주신다.


여행에서 남는 것은 사진인데 소중한 사람과 함께 담기기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찍어드린다. 이럴 땐 사진에 취미가 있는 것이 뿌듯해진다. 보답으로 우리 부부의 투샷도 얻었다. 한국인의 미덕, 상부상조. 그리고 어느 여행지를 가든 외국인들보다는 한국인들에게 좋은 사진을 얻을 확률이 크다.

북 바인딩 샵, Note a book

잠깐이지만 한국인들끼리의 정을 나눈 뒤, 샵으로 들어섰다. 벽을 가득 채운 샘플 책들과, 책을 만들기 위한 가죽, 실, 포스터 등 여러 가지 재료들이 있었다. 이곳에서 바인딩한 노트를 구입하면 각인까지 해준다고 한다.

오늘은 한 바퀴 둘러보고 나왔지만 다음번에 다시 와서 꼭 나만의 노트를 만들리라.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면 이렇게 다음을 기약할 수가 있다.


반캉왓 입구에 들어섰는데 비가 와서 내가 생각하던 푸릇하고 햇볕이 내리쬐는 느낌은 아녔으나 이곳만의 분위기가 있었다. 아티스틱함과 히피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느낌이었다.

반캉왓의 분위기

비가 그칠 때까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GRAPH라는 카페는 로스터리이자, 커피를 주로 한 베리에이션 음료, 석탄커피, 장미커피,  커피 칵테일 등 다양한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올드타운과 님만해민에도 있는데 반캉왓에서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블렌딩 한 원두 ‘wild weekend’로 내린 필터커피를 주문했다. 치앙마이와 근처 치앙라이에서 생산한 원두를 블렌딩해 만든 원두로 가볍고, 베르가못과 같은 열대과일 정도의 산미가 느껴짐과 동시에 밀크 초콜릿으로 마무리되며 스윗하게 밸런스를 잡는 커핑노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물론 영어로 설명해 주셨지만, 나는 커핑노트를 읽고 알았다^^).

반캉왓 내의 GRAPH COFFEE / 내가 마신 필터커피

이전에는 산미 있는 커피는 절대로 마시지 않았고, 고소한 원두를 좋아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베리류, 시트러스류의 향이 느껴지는 커피들이 좋아지고 커피를 마시면서 거기서 느껴지는 여러 가지 향과 맛을 추측해 보는 것이 재밌어진 터였다.

그렇게 달라진 나의 커피 취향을 아주 만족하는 곳이 바로 치앙마이였다(그렇다고 고소한 커피나 라떼류를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나 숙성우유로 만드는 더티커피는 최고의 맛!).


커피를 받아 목재 창문 근처에 자리를 잡았는데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향긋한 커피를 마시는 순간은 또 그 순간대로 좋았다.

이따금 창밖을 바라보면 플리마켓을 연 사람들이 비가 내리면 가림막을 순식간에 내리고 비가 살짝 그치면 다시 걷어두는 것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날씨가 그들에게 저런 순발력을 가르쳐주었을까.

관광객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소중한 작품이 비에 젖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공존했기 때문이리라.


예술가마을 반캉왓의 상점들

잠시 비가 그쳐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크지는 않았지만 원형 공연장을 중심으로 카페, 각종 공방과 물감 따위를 판매하는 화방, 책방, 식당, 플리마켓 등이 커다란 나무 사이사이로 자유로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도자기 공방, 금속 공예 공방 등 하나씩 들어가 작품들을 구경하는데 야속하게도 또 비가 쏟아졌다. 마침 직접 물감으로 페인팅을 해볼 수 있는 공방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남편에게 들어가서 그림 그려볼래?라고 제안했다. 그는 약간 주저했지만 비가 쏟아지는 틈에 손을 잡아끌어 들어갔다.

캔버스에 그릴 수도 있지만 접시나 컵 등의 도자기를 색칠해볼 수도 있었다. 둘 다 미술에 소질이 없는 우리는 접시 하나, 컵 하나를 골라 칠해보기로 했다.

앞치마를 메고 붓을 잡았다. 고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 잡아 보는 붓이었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 고민하다가 남편은 본인이 창업하는 새 회사의 로고를 그려보고 나는 꽃밭과 파란 하늘을 그려보기로 했다. 그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고 점점 더 재미있어 우리는 몰입했다.

시간 가는줄 모르고 몰입했던 그림 그리기

그러다 남편이 한 마디 했다.


아니 하트시그널 같은 연애 프로그램에서 이런 데이트 왜 하나 했는데.
꽤 재밌다. 왜 하는 줄 알겠는데?


좋아하는 것이 변하지 않고, 늘 거의 똑같은 일상을 사는 남편의 특성상 거의 똑같은 데이트(주로 카페 가서 책 읽음)만 하는 우리 부부로서는 사실 꽤나 독특한 데이트를 한 셈인데 의외로 재밌어하는 남편이 신기했다.


박사과정 중에 나는 한국아동학회에서 주관하는 기질검사 워크숍에 참여해 기질-성격 검사(TCI)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제는 기질이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지만

잠깐 설명을 덧붙이면 ‘기질’이란 유전적으로 결정된 생물학적 특징으로 쉽게 말하면 타고난 성향이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본능적 반응을 말한다.

그리고 ‘성격’은 만들어진 부분이자 성장하면서 변화하는 것으로서 환경적 영향과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심리적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서두가 길어졌는데, 어쨌건 이 기질검사에서는 기질이 4가지 축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자극추구’, ‘위험회피’, ‘사회적 민감성’, ‘인내력’이 그것이다.

각각의 축에는 성향의 높고 낮음이 있는데 대부분의 성격검사(mbti처럼)가 그렇듯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반대의 성향을 갖추는 것이 진화나 적응에 유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J 성향이 극단적인 사람이 자신의 계획이 틀어져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지만 P 성향이 가지는 융통성을 후천적으로 학습한다면 스트레스 수준을 낮출 수 있는 것과 같다.


남편과 나는 네 가지 축에서 거의 다 반대방향이지만 그중에서도 자극추구와 위험회피에 대한 부분이 상반된다.

자극추구는 말 그대로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것으로 새롭고 낯선 상황 탐색을 좋아하고 단조로운 작업을 견디기 힘들어해 늘 변화를 추구하며, 약간은 충동적인 성향을 말한다.

자극추구 기질이 낮으면 익숙한 것을 선호하고, 새로운 사람이나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더디고 어떤 결정을 내릴 때도 심사 숙고한다.


나는 자극추구 성향이 아주 높은 편, 남편은 아주 낮은 편이다. 남편은 나와 만나면서 새롭게 하게 된 것들이 아주 많다. 예를 들면 회를 전혀 먹지 않던 사람인데, 나를 만나 먹게 되었다거나 해외여행은 수학여행이 전부였지만, 내가 여기저기로 데리고 떠난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위험회피 기질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잠재적인 위험에 대한 걱정과 불안 등을 말한다. 위험회피 기질이 높으면 익숙한 상황에서도 긴장하고, 사소한 어려움이 예상되어도 미리 걱정한다.

반면 낮으면, 잠재적 위험이 예상되어도 잘 위축되지 않고 대체로 자신감 있고 낙관적 태도를 보인다.


역시나 나는 위험회피 기질이 아주 낮고, 남편은 아주 높은 편이라 나는 별다른 걱정하지 않고 모험에 뛰어드는 편이라면 남편은 정말 일어나지 않을 일을 100가지 정도는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치앙마이에서 나 홀로 한달살이를 허락해 준 것은 그의 기질에 아주 반하는 것이자, 그의 스트레스를 증폭시키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난임으로 인해 나의 모든 낙천성과 대담성이 무너지는 것을 본 그로서는 극복하기 위해 떠나겠다는 나의 결정과 부탁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차마 그가 놓을 수 없던 한 가지는 ‘새로운 환경을 본인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와 함께 첫 4박 5일을 이곳에서 지내겠다고 흔쾌히 따라온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치앙마이 정말 괜찮다.”, “여기 안전하네.”, “이 정도면 안심이야.”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했다.


그가 그런 말을 계속했다는 것을 아마도 이 글을 보면서 처음 알게 될 것이다.



어쨌건 우리는 컵 하나와 접시 하나를 완성해 고이 챙긴 뒤  반캉왓 마을과 인사를 고하고, 주변에서 아주 유명한 맛집 ‘아디락피자‘에 방문했다. 화덕피자로 유명한 곳에서 우리는 1인 1판으로 피자를 해치우고 호텔로 돌아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을 싼 후에는 그랩을 통해 택시를 부르고 내가 아주아주 고대하던 앞으로 3주를 지낼 레지던스로 이동했다.

2편(됐고,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아볼래.​)에서 썼듯이 나는 이곳의 루프탑 수영장에 반해 치앙마이 한 달 살이를 결정했다. 매일 수영을 하고 일광욕을 한 뒤 일과를 시작하고 일과를 마무리하면서는 꼭대기층에 있는 피트니스에서 운동을 할 당찬 계획을 세웠다.

내일부터 신나게 이용할 수영장과 피트니스

방에 들어서서 나는 이 방이 얼마나 예쁜지, 뷰는 어떤지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면 남편은 물이 새진 않는지, 문은 잘 잠기는지, 침구는 깨끗한지 벌레는 없는지, 방충망은 멀쩡한지, 수압은 적당한지 온갖 곳을 살펴주었다. 이제부터는 3주를 살 방이니 캐리어의 짐도 다 풀어둘 수 있고, 앞으로 먹을 것들도 냉장고에 채워놓을 수 있다!

(이 일이 앞으로 어떤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지 다다음 편​쯤에 공개됩니다.)

이제부터 머물게 될 치앙마이 우리집!

방을 둘러보고 짐을 대충 푼 뒤엔 ‘센트럴페스티벌’이라고 치앙마이에서 가장 큰 쇼핑몰에 갔다. 남편은 내가 며칠간 먹을 식재료와 물, 방향제와 방충제, 방에서 신을 슬리퍼, 세제, 간식 등을 바리바리 사주었다. 그리고 냉장고와 각종 수납장에 꽉꽉 채워주었다.


그리고는 정작 자기는 시간이 없어 저녁도 먹지 못한 채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까지 배웅하겠다고 했으나 돌아오는 길이 위험하다며 한사코 거절하고 혼자 택시를 타고 떠났다.


남편을 택시에 태워 보낸 순간 거짓말처럼 눈물이 펑펑 났다. 소리까지 내면서 엉엉 울정도로 급작스러운 슬픔이 찾아왔다. 혼자 지내는 것 하나도 두렵지 않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자신 있었다.그런데 막상 그가 떠나니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하고, 나 혼자 여기서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몰려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서  나 혼자 이러고 있나, 심신의 회복을 그냥 한국에 돌아가서 할까.’라는 마음이 들어 엉엉 울며 남편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는데, 남편도 이미 울고 있었다. 우리는 울고 불며 공항에 가는 내내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아마도 택시기사님은 우리가 영영 이별하거나 적어도 몇 년간은 못 보는 줄 알았을 테다.


그야말로 견우직녀의 작별이자 진정한 홀로서기의 시작이었다.

엉엉 울며 작별하던 순간


남편이 사준 치킨 한 마리를 먹으며 혼자 태블릿으로 드라마를 보는데 이미 비행기를 탄 남편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 문자를 남겼다.

혼자 식사를 하며 남편의 소중함을 느낀 나

위험회피 성향이 낮고,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나는

그날밤 아주 작은 소리에도 흠칫하며 깼고,

익숙한 내 방 침대가 그리워 엉엉 울었다.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 둘에서 혼자가 된 순간, 보였다.

그는 이렇게 나를 또 성장시킨다.


우리는 이제 관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우선 투사가 걷히고 나면 우리는
모르고 있거나 거부했던 자신의 일부분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타자가 지닌 다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내면의 변증법을 따라야 하며,
이는 두 사람 모두의 성장에 필요한 자극이 된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나는 나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타자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돌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넓히기 위해서다.

영혼이 넓어진 이에게 타자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다.

(제임스 홀리스, 사랑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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